설교/이사야

날카로운 칼, 갈고 닦은 화살

이창무 2015. 6. 18.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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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칼, 갈고 닦은 화살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이사야 49:1-2)


인터넷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삶의 변화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다양한 설교를 접하기가 쉬워졌다는 것입니다. 검색창에서 설교를 검색해 보면 엄청난 양의 설교가 쏟아집니다. 뿐만 아니라 유트브나 팟캐스트 등등을 통해 동영상으로 유명한 분들의 좋은 설교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인도하거나 메시지를 쓸 때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그러나 과거보다 권세 있고 날카로운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마치 바다 한 가운데 있으면 물은 넘쳐 나지만 정작 마실 물이 없어 목마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종은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종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말씀의 종은 어떻게 부르심을 받으며 또 말씀의 종은 어떻게 빚어지는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여기서 섬들은 이스라엘에서 바다를 건나야 도달할 수 있는 먼 나라들을 말합니다. 먼 곳 백성들 역시 땅 끝에 있는 이방 나라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먼 곳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이웃에 살아도 마음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으면 그 사람도 역시 섬들이며 먼 곳 백성들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는 누구일까요? 본문의 나는 물론 이사야 선지자 자신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대변인 역할을 맡게 될 말씀의 종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종은 아무나 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생각은 청와대 대변인으로 공식적으로 임명 받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대언하라고 부르신 사람만이 말씀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종은 언제 부르심을 받습니까? 이사야서 6장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성전에 갔다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하나님의 탄식하시는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응답한 후부터 선지자로서 삶을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가 BC 745년이기 때문에 이사야는 BC 745년에 부르심에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르심이 태에서부터 어머니 배 속에 있는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사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뱃 속에서 발차기를 하고 있을 그 때에 이미 말씀의 종으로 하나님께 선택 받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성전에서 부르심은 다만 부르심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었을 뿐입니다. 내적인 부르심은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은 창세 전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말씀의 종은 나의 선택과 응답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말씀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목자는 다 말씀의 종들입니다. 누구에 의해 목자가 되었습니까? 집요하고 끈질긴 일대일 목자님에 의해 강권함을 받아 목자가 되셨습니까? 또 언제 목자가 되었습니까? 목자 선서를 하는 날 , 예전 같으면 소회 선서를 하는 날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을까요? 우리는 이런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현상 너머에 있는 신비한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그 영적 실체는 다름 아니라 내가 어머니 뱃 속에 있을 때 아니 이 천지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여 이 시대에 자신의 뜻을 드러낼 도구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외적인 사건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부르심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의 마음에 감동 감화하심을 일으키시고 그의 의지를 굴복시켜서 반드시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만드십니다. 지난 주 김현유 목자님의 메시지를 들어 보니 현유 목자님은 부르심을 거부하고 떠나려고 아주 여러 차례 마음을 먹었었습니다. 그러나 다 찍어 본 텝스 시험인데 이상하게 정답만 찍는 바람에 실패하기도 하고 지방에 직장을 구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수도권에 직장을 잡게 되어 실패하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방면에서 김현유 목자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절대 부족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지금 이곳에 내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며, 이 자리에 오기까지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셨으며, 그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태에서부터 말씀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말씀의 종으로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손건수 목자님만 봐서 알 듯이 번듯한 대한민국 공군 소위가 되려고만 해도 3개월 동안의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말씀의 종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당연히 훈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의 종을 어떻게 연단하시고 훈련하십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하나님은 말씀의 종을 날카로운 칼과  갈고 닦은 화살촉과 같게 만드십니다. 칼의 날카로움은 잘라내고 파헤치는 효과를 위한 것입니다. 화살촉을 가는 것은 화살촉의 거칠고 불규칙한 부분을 제거해서 날아갈 때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이 날카롭다는 것은 본질을 잘 파헤쳐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은 누구인지, 역사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두리 뭉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핵심을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말씀이 정확하다는 것은 말씀이 의도한 바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장소에서 드러내어 온전히 실현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카로운 칼과 같고 닦은 화살촉과 같은 말씀의 종들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애통하게 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두려워 벌벌 떨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전한 설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장 중에 있는 죄인들’이란 설교입니다. 이 설교는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는 당시에 조나단 에드워드가 끝까지 전하지 못하고 도중에 중단해야만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듣는 도중에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탄식하고 애통해 하며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바람에 도저히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설교문을 읽다가 죄인의 상태는 마치 뜨거운 열기를 뿜고 있는 화덕 위에 가늘고 긴 거미줄 하나를 달랑 의지하고 있는 거미와 같은데 그 거미줄에 불이 붙어 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충격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유명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원래 외과 의사 출신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는 마치 외과의사가 메스를 들고 영혼의 환부를 도려내는 듯 하다고 평합니다. 또 갈고 닦은 화살촉 같은 말씀은 각 사람의 폐부를 정확하게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말씀의 진리 앞에 전율하고 엎드려져 굴복케 만듭니다. 말씀의 종이 이렇게 날카롭고 정확해야 명실상부한 말씀의 종이라고 불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말씀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기왕 성경 선생이 된 이상 무딘 날이어서 무도 못 썰고 항상 과녁지를 벗어나서 변죽만 울리는 그런 성경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날카로운 말씀의 종이 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연단이 필요합니다. 날카로운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가 찬물에 식혔다가 망치로 두들기는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연단의 과정을 더 철저하게 더 많이 할수록 그 검은 명감으로 변해 갑니다. 매끈한 화살촉을 만들기 위해서는 줄로 밀고 사포로 깍고 다듬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이처럼 날카로운 말씀의 종이 되려면 연단과 훈련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이 연단 과정은 크게 말의 연단과 인격의 연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말이 연단된다는 것은 공부를 통해서 필요한 지식과 이해를 습득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이 공부에는 물론 성경 공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일용할 양식을 신실하게 감당하며 매주 소감을 깊이 있게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공부는 성경 공부만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를 깊이 있게 그리고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은 신앙 서적과 신학 서적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기독교 강요 같은 책은 강요를 해서라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 즉 철학, 문학, 역사학 서적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교회사의 위대한 말씀의 종들 가운데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드 이런 분들의 전기를 읽어 보면 제 말이 틀린 말이 아니란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말의 연단만으로 말씀의 종이 되지는 않습니다. 말씀의 종은 그에 맞는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한번 메시지를 전하면 기가 막히게 전하는데 삶이 엉망진창이라면 누가 그 말을 신뢰하고 받아들이겠습니까? 잠깐 동안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얼마 못가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거칠고 모난 인격은 갈고 다듬어져야 합니다.  인격은 습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습관은 훈련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특히 고난으로 연단 받아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을 겪어 보아야만 합니다. 정과 망치를 든 미켈란젤로의 손길에 의해 깨지고 깍이고 다듬어져 피에타 상과 같은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듯이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정과 망치에 의해 우리 인생이 깨지고 깎이고 다듬어질 때 비로서 빼어난 말씀의 종 한 사람이 탄생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려야 합니다. 2절에 보면 “나를 그의 손에 숨기시며”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며”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칼과 화살촉은 아무 때나 막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본격적으로 선을 보이기 전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칼집과 화살통에 숨어 있습니다. 여기서 숨기며 감추신다는 말은 말씀의 종이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과 친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대통령의 대변인은 대통령과 늘 가까이 있으면 대통령의 깊굿한 속 생각까지도 이해하고 있어야 제대로 대변인 노릇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종은 평소에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속 마음까지 통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자기 주장만 늘어 놓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말씀의 종은 말씀의 종으로 자격 상실입니다. 말씀을 남에게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내가 말씀을 듣는 예배자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에 집중할 때 자연스럽게 이 시대 사람들에게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말씀의 종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전심전력으로 분투한다 해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우리가 날카로운 말씀의 종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매주 한 편의 소감을 신실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체면 때문에 혹은 의무감에서 소감을 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복중에서부터 날카로운 칼과 갈고 닦은 화살처럼 빼어난 말씀의 종으로 소원 두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 편의 소감에도 전심전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는 말씀의 종으로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올해 우리 모두가 작년보다 더 날카롭고 정확한 말씀의 종으로 빚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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