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천신학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요약) / 게르하르트 로핑크

이창무 2015. 5. 20.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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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게르하르트 로핑크


1. 머리말


예수는 교회를 세운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예수에게는 교회 대신에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사역을 했다. 그러므로 비록 예수에게서 어떤 교회 창설 사례를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고, 무엇을 원하였던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통해 오늘날의 바람직한 교회 모습을 찾아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2. 예수와 이스라엘


예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맥을 같이한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아브라함의 자손 곧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백성에게 심판과 회개를 전파한다.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가차 없이 심판을 내릴 거라고 외친다. 이와 같은 세례 요한의 사역은 세계 인류 전체를 상대로 한 것도 아니요, 각자 개인별로 상대한 것도 아니며, 오로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며, 세례 요한의 관심사는 당시 바리새인과 에세네파 열심당원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대로 이스라엘의 실존에 관한 문제들이었다. 사실 예수의 사역도 그 출발은 세례 요한의 그것과 궤를 같이하였으며, 세례 요한의 연장선상에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준비를 시키려 했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실존에 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민족이 처한  심각한 정체성 위기에 대해 대답을 주려고 했던 것이다.


예수가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사역을 펼쳤다는 것은 그의 제자를 열두 명으로 선정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온전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자기 민족 전체를 말하자면 잃어버린 양들로 생각하고 그들을 다시 모으는데 관심을 두었다.  마10:5~6에 보듯이, 예수는 “너희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고 한다. 여기서 잃어버린 양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지칭한 것이며, 민족 전체가 길을 잃고 흩어진 양떼로 비유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는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모으시길 원한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예수는 열두 제자를 모으되 세리 마태로부터 열혈당원 시몬까지 각 계층을 망라하였고, 가난한 자와 부자, 갈릴리 시골주민과 예루살렘 수도 시민 모두 다에게로 나아갔다.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다시 모으는 사역을 한 것을 그의 치유이적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의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는 치유이적을 많이 행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치유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도래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의 권능행적들은 하나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표징들이다. 눅11:20에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더 나아가 예수의 치유 이적은 하나님 백성의 회복과도 관계가 된다. 즉, 예수의 이적은 병자를 고침으로써 말세 구원시대의 온전한 하나님 백성을 재건하는 일에 기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재건하는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 어느 누구도 구원에서 배제될  수 없으며, 물론 소외자도, 죄인도, 그리고 병자도 다 포함되어야 한다.


예수의 하나님 백성의 회복에 관한 관심은 주기도문에서도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나오는데, 여기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길 바란다”는 기원의 속뜻은 사실은 구약 에스겔서 36장의 내용과 연결이 되어 있다. 거기에서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이방인들 속에 흩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말한다. 즉, 이방인들로 하여금 여호와라는 신은 자기 백성도 지켜주지 못하는 한심한 신이구나! 하는 평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23절에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해 달라는 뜻은 곧 이스라엘 민족의 재건을 이루어 달라는 소원이며, 이를 위해 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셨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면 예수에게는 이스라엘만 관심의 대상이었고, 이방인은 관심 밖의 대상이었는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예수는 결코 이방인을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오로지 이스라엘만을 상대하기를 원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처럼 이방인을 대상으로는 치유의 사역을 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면서도 마8:11~12에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고 하면서 이방인에까지 확장된 구원의 성취를 내다보았다. 그러면 예수의 뜻은 무엇인가? 예수는 이사야 60장 1~4절의 예언을 마음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예언은 즉,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세상) 나라들은 네 빛으로, (세상)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을 원하시지만, 이 구원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즉, 이방 민족들은 기존의 이스라엘에 같이 참여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왜 예수가 이방인에게 사뭇 개방적이면서도 자신의 활동을 이스라엘에게 한정시키는지, 정작 어째서 그처럼 당연한 양 이스라엘만을 상대하는지를 납득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도 결국에는 막11:17에서처럼,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임을 예수는 내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들과는 달리 정작 예수가 대상으로 삼고 사역하고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의 기대에 어긋나게 된다. 예를 들어, 마 11:21~22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고 한 사실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빛을 발해야 할 사명, 그래서 이방인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 나라로 나올 수 있게 하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위의 두 도시들은 상징적으로 온 이스라엘을 대표할 따름이었다. 즉,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결정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는 이 시점에서라도 이렇게 날카롭게 경고를 발함으로써, 마지막 순간에라도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예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대하였지만 전망은 어둡기만 했다.


이러한 위기가 절정에 이르자,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자신의 확실한 죽음을 내다보며 “많은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것을 말한다. 이는 결국 예수가 죽음으로써 그가 흘린 피의 공로를 통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새로운 구원(새로운 계약) 개념으로 정립된다. 그러면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버리고 이방 백성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맞은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예수는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이 세상에 온 존재였던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온 사명을 걸었던 자기 동족을 어떻게 그렇게 마지막 순간에 쉽게 잊어버릴 수 있었겠는가? 특히 당대 유대인들은 사53:12의 말씀, 곧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였다는 말 중에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일단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고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예수를 거슬러 대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그들의 죄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만일 이스라엘이 이 구원을 받아들이고 회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 만민을 위한 징표가 될 것이요, 세계 만민도 이제는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같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애정은 예수 자신으로 하여금 남은 하나의 길, 곧 많은 사람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죽어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략히 정리하면, 예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 백성의 집결과 재건이 가장 중요하였다. 그리고 그의 모든 경고, 말씀, 예수의 활동 전체가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또, 예수의 사역의 오직 하나의 지향점은 말세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세계 여러 백성들 중에 하나 곧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였으며, 그 이스라엘 민족이 말세에 빛을 발하게 함으로써 이방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로 몰려들어, 이스라엘 안에서 이스라엘의 매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그 대강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다른 이방인들이 보기에 이스라엘이 참으로 구원의 징표 또는 상징으로서 인식될 수 있을 때에라야 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뚜렷이, 실감나게, 과연 눈에 띄게 달라졌을 때라야 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선택사관(選擇史觀)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비록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자기에게 대항하였을 때에라도 공동체 사상 즉, 하나님 통치에는 한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자기 제자단에 대해 집중적으로 주력하였다. 그러니까 온 이스라엘을 도외시하지는 않되, 제자들의 공동체에다가 하나님 나라를 연결 지었던 것이다.


3. 예수와 제자들


예수는 무슨 공동체를 원했던가? 지금까지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다. 즉, 예수의 생각은 유난히 이스라엘과 관련되어 있되 이스라엘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예수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더 큰 목표에 이르는 중간 과정이며, 보편적인 구원을 상징하는 징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는 그가 모으려고 했던 이스라엘을, 참 하나님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던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곧 예수의 제자교육을 살펴봄으로써 알 수가 있다.


먼저, 예수의 제자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제자단은 원칙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되 자기네가 사는 시골이나 도시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 즉 베다니, 데가볼리 등에 살면서 하나님 왕국의 통치를 기다리며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베다니의 나사로, 세리 삭개오, 아리마대 요셉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자기의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온전히 예수를 추종한 열두 제자를 비롯한 측근의 제자들이 있다. 이 둘 중 어느 부류이든 간에 이들은 말세에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의 협력자들이요, 이스라엘을 모으는 일의 협력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구분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예수의 제자단을 이스라엘 민족과 구분된 집단으로 생각하거나, 이스라엘의 남은 자 또는 그루터기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비성서적인 사상이다. 예수의 제자 공동체는 오로지 온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이자 대표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단은 말세의 하나님 백성을 예표하는데 오로지 그 의미가 있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구체적 예로서, 우리가 예수의 산상설교를 보더라도 제자들만을 위한 예수의 가르침과 온 이스라엘을 위한 예수의 가르침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산상설교의 대상은 이스라엘 전체이자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자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누가복음의 “평지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이 설교들은 오직 제자단만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에게 해당되는 설교이었다. 설사 어떤 한 가르침이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제자단은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었고, 따라서 이는 결국 온 하나님 아라의 백성에게 해당되는 교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의 대상은 고립된 개인도 아니요, 인류 전체도 아니며,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자단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더 나아가 예수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꾸릴 것을 요구하였다. 즉, 제자들에게 전에 갖고 있던 직업을 버리고 가족을 떠날 것, 소유를 포기할 것, 내일 일을 돌보지 말 것 등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자기 가족으로부터의 해체를 요구하고, 스스로 새로운 가족으로의 편입을 요구하였다. 마가복음 3:33~35에서 보듯이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새 가족인가? 제자단만인가? 예수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새 가족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의 메시지를 믿고,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한다. 비단 제자만이 아니라, 바야흐로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하나님 나라로 몰려드는 모든 사람들을 말한다. 즉, 예수의 형제와 자매라는 새 가족은 본격적인 제자단을 넘어서는, 더 멀리 확장된 범주의 가족이다.


물론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비교적 소수만이 예수와 함께 객지를 돌아다니며 생활을 했다. 대다수는 가정에 머물었다. 그러나 이때 비록 고향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가정이라 하더라도 종전에 비해 점차 달라지게 된다. 즉, 더 솔선적이고 더 개방적인 가정들이 된다. 이미 친족끼리만 더 이상 유유상종하지 않는다. 기꺼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환대한다. 가정들 간에 서로가 관계를 맺는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어 가정들이 분열되고 예수 운동이 배척당한다. 수많은 개인이 옛 형식과 결별을 고하고, 새 가정과 결합한다. 이리하여 옛 이스라엘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새 사회가 우선은 아직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실상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생겨난다.


새 가정과 더불어 우리가 추가적으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새 가정에서는 종래의 아버지의 역할이 이제 끝이 났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마23:9에서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는 아버지 곧 ‘압바’라는 칭호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새 가정의 아버지 또는 아빠의 호칭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는 하늘에 계신 분을 압바로 모시고 있으니, 땅위의 다른 누구를 압바라고 부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새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지배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모성과 우애와 자녀됨 만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제자 공동체 안에서는 가부장적 지배관계는 이제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며, 서로 종이 되어 섬기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새 가정에서는 폭력이 단념되어야 한다. 폭력을 단념하라는 예수의 요청이 가장 뚜렷한 대목은 마5:39~42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말씀은 폭력의 단념에 대한 예수의 철저한 윤리를 반영한다. 이는 새 가정 내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한 대외적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참 하나님 백성, 참 예수의 가족은 무슨 일에든지 폭력으로 무엇을 관철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폭력으로 권리를 관철하느니 차라리 불의를 감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예수가 모으려고 하는 하나님 백성이야말로 대안(代案)사회라고 일컫기에 손색이 없다. 이 사회 안에서는 이 세상 권세들의 폭력구조가 아니라, 화해와 우애가 전체 분위기를 지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렇게, 즉 마5:39~42의 말씀처럼 비폭력적으로 사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이 의문은 비단 폭력 단념의 경우만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예수가 제시하는 모든 윤리적인 명제에서 제기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 대부분이 철저한 윤리 규정이기 때문이다. 마7:24에서 보듯이, 예수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라고 하였다. 그만큼 실행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할 것은,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가 않다고 예수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제시하는 새 가정으로 들어선 사람은 마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기쁘고, 또 온 마음이 사로 잡혀서 그 일이 전혀 어려운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는 마11:29~30에서처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명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라고 말함과 같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는 “산 위의 도시”와 같은 공동체이다. 이는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이다. 세상 속에 잠겨 들어가 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의 등불과 같이, 세상의 소금과 같이 세상에서의 맡은 바 그 역할을 감당하기를 예수는 바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공동체는 자기네끼리 엘리트 집단을 이루거나, 스스로 세상과 절연하는 그런 공동체와는 다르다. 교회는 지상의 소금이요 세상이 빛이며, 드넓게 빛을 비추는 세상 속에서의 세상을 위한 공동체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때문에 교회는 그 자신이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 안에서 번영해서는 안 되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해야 한다.


4. 신약 공동체의 예수 추종


예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들의 고향이자 근거지였던 갈릴리를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으며, 거기서 원초적인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행2:14이하의 베드로의 설교에서 보듯이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일, 행2:38 이하에서 보듯이 회개자들에 대한 세례를 주는 일, 그리고 행1:12 이하에서 보듯이 가룟 유다의 유고에 따른 12제자단 보선 등의 일을 통해 지금까지 예수가 관심을 가져왔던, 말세의 이스라엘을 모으고 준비시키는 일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 중에서도 12제자단 보선은 예수가 시작한 말세의 하나님 백성 집결운동이 예수 부활 후에 제자 공동체에 의해 예수에게 충실한 태도로 계속 수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한 사례이다.


예수 부활 후 제자들로 이루어진 이 기독교 원초 공동체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추가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회개를 유도해 나갔으며,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엑클레시아’ 또는 ‘성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의 주류인 참 이스라엘로 자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런 교회 원초 공동체가 더 나아가 당시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던 이스라엘에 대하여 구원사적 자격을 박탈하려고 하자, 사도 바울이 등장하여 교회와 회당의 영속적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이를 해결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받아들여지게 된 사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예수에 대한 그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당분간 교회의 소임은 이스라엘을 질투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 따라서 신약시대의 교회는 이스라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교회가 만일 이스라엘과의 영속적 관계를 망각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게 될 것임을 밝혔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원초 공동체인 교회가 예수가 가졌던 온 이스라엘을 향한 제자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관심을 그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원초 공동체가 참 이스라엘로 자처한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무슨 이데올로기를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그들에게는 어떤 체험들이 있었다. 이는 곧 예수 부활 후에 일어난 “성령운동”이었다. 따라서 원초 공동체의 이러한 자기인식을 이해하려면, 그들 가운데 성령이 살아서 같이 한다는 의식이 그들 마음 속 저변에 깔려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원초 공동체와 함께 하였던 성령의 역사, 곧 병자치유와 귀신을 쫓아내는 역사는 예수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예수 당시의 설교와 치유의 밀착이 원초교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복음의 선포들을 따라다니며 정당화하는 표징으로서만이 아니라, 영의 현존을 말해주는 표징으로도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말한다면, 원초 교회는 성령의 현존을 말한다.


원초 교회에서는 “사회적 장벽들이 무시”되었다. 요엘 선지자는 욜2;28 이하에서 보듯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라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이 행2:17 이하에 그대로 인용되었는데, 이는 원초 교회에서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예수가 생각했던 화합된 사회로서의 이스라엘이 그대로 전해져 내려와 원초 교회에서 그대로 실현되었다. 예수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식자도, 무식한 사람도, 갈릴리 시골 사람도, 예루살렘 도시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병자도, 의인도, 그리고 죄인도 다 같이 어울리는 사회로서의 이스라엘을 꿈꾸었다. 그 전통을 따라 원초 교회에서도 늙은이와 젊은이, 어린이, 남녀 구분 없이 다 평등하게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특히 여자들이 대우를 받는 전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더 나아가 원초 교회 안에서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노예이든, 자유인이든 모두가 한 영으로 세례를 받은, 한 형제요 한 자매가 되었다.


그리고 원초 교회 공동체에서는 “서로가 함께”를 실천하는 공동체로 나아갔는데, 이는 초기의 바울서신 등 서신에서 당시의 공동체 내의 여러 가르침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십시오(롬12:10)”, “서로 합심하십시오(롬12:16)”,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롬15:7)”, “서로 충고하십시오(롬15:14)” , “서로 거룩한 입맞춤으로 인사하십시오(롬16:16)”,  “서로 사랑으로 남을 섬기십시오(갈5:13)”, “서로 선을 행하십시오(살전5:15)”, “서로 순종하십시오(엡5:21)”, “서로 죄를 고백하십시오(약5:16)”, “서로 대접하십시오(벧전4:9)”, “서로 친교를 나누십시오(요일1:7)”등 수도 없이 많다. 예수에게나 바울에게나 다 같이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 뜻에 따라 최종적으로 달성될 하나님 백성의 집결, 더 나아가 하나님 백성의 건설이었던 것이다.


원초 교회 공동체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형제애”이었다. 이는 이미 예수가 제시하신 ‘새 가정’의 개념에 따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막3:35 이하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고 하였고, 눅 12장 53절에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고 하여 에수는 이미 ‘새 가정’의 출현을 예고한 바 있다. 초기 교회 공동체도 이러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벧전 2:17에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고 하였다. 살전 4:9~10에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던 가르침이 신약성서의 서신들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롬 12장에서처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고 가르친다. 즉, 신약의 원초 교회는 예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또한 신약의 원초 교회 내에서는 “지배의 단념”이 계속 이루어졌는데, 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예수는 사회에서 이루어져있는 어떤 지배관계와 지배구조를 제자 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을 단연코 거부하였다. 즉, 형제들의 공동체 안에서는 아버지들의 군림이 없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막10:35 이하에서 보듯이, 제자들 가운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였다. 예수의 권위는 폭력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자기가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둘지언정 그대로 무방비상태에서 당하고 마는 그러한 권위, 곧 역설적 권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사도 바울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바울은 원초 기독교 공동체에 대해 몸소 실천함과 가르침으로 그 본을 보여 주었다.


신약 초기 교회는 “대조사회”(Kontrastgesellshaft)로서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대조사회란 온 실존으로 즉, 영적 차원이나 실제 사회적인 차원에까지도 하나님의 선택과 소명을 의식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상의 다른 모든 백성과 구별되게 사는 그러한 사회를 말한다. 신명기 7장 6절 이하에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을 만민 속에서 가려내고 애굽에서 건져내셨으니, 여기에 이 백성의 처신이 부합해야 하고, 마땅히 세상과 다른 사회질서를 가진,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초기 공동체에서도 많은 부분 받아들여졌으며, 교회란 일반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대조사회로서 존재한다는 인식이 신약성서 안에 다양한 개념들로 생생히 살아 있다. 예를 들어, 엡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롬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가르친다.


아울러 초기 교회 공동체는 만민을 위한 징표가 되기를 지향하였다. 예컨대, 꿈란 공동체처럼 이 세상과 동떨어져 살기를 추구하지 않았다. 이 세상 속에서 이방 사람들과 같이 섞여 살면서, 믿는 자로서 안 믿는 이방인들에 대해 모범적인 징표가 되기를 노력하였다. 예수가 애초에 이스라엘 동족에게만 집중했던 이유는, 전 세계로 확대해 나아가는 보편주의를 택할 줄 몰라서가 아니고, 다른 세상 사람들을 등져서도 아니며,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결집시키고, 한 장소에서 이스라엘이 빛을 발하게 함으로써, 다른 민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뜻을 원초교회는 역시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행15:13 이하에 야고보는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재건이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이유는 이방인 민족들도 주님을 찾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사60:1~3에 보듯이, 이스라엘이 일어나 빛을 발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위에 나타날 때에, 세계의 다른 나라들은 이스라엘의 빛으로, 그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비전을 원초 교회 공동체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한 구원사의 진행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부분의 저항으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몇몇 사람들 즉, 거룩한 남은 자들 외에는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자기네의 메시야에게 오히려 걸려 넘어졌고, 복음을 거부하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믿음을 통해 다른 민족들에게 구원이 전달되지 못하자, 이제는 그들의 불신을 통해 구원이 이방 민족들에게 전달되게 되었다. 이때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선사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질투하게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전략이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있다. 롬11:12 이하에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민족들의 운명이 이스라엘의 길과, 또 거꾸로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다른 민족들의 길과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원초 교회 공동체는 행 15장과 눅 2장, 롬 9~11장 그리고 에베소서를 검토해 보면 알지만, 여느 사회에 대한 “저항을 위한 저항”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대조사회인 교회란 엘리트 의식에 젖은 사고방식에서 비롯하는 여느 사회에 대한 멸시를 뜻하기는커녕, 어디까지나 오로지 남들 때문에, 남들을 위한 대조를, 그러니까 “지상의 소금”, “세상의 빛”, “산 위의 도시”라는 표상들과 같은 그런 대조를 말한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또, 오로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바로 그 까닭에, 교회가 세상으로 변해서는 안 되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반대로 교회가 본디 모습을 잃고 그 빛이 꺼지며, 그 소금이 싱거워진다면, 그런 교회는 어떤 사회라도 변화시킬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전통을 초기 공동체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5. 고대 교회의 예수 추종


지금까지 살펴 본 대로, 원초 교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실천이라는 단호한 노선을 취하여, 외적인 맥락들이 달라져 있던 당시 상황 속에서도, 의미상으로 부합되면서도 동시에 내용적으로도 타당한 방향으로 전통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렇다고 해서 신약성서의 공동체들이 예수에 비하여 손색없이, 주저와 실수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 예수에 의한 참 이스라엘의 모음과 더불어, 세상의 다른 모든 사회에 비하여 확고한 비판 기준을 갖고, 이를 유감없이 그리고 적절하게 발휘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원초 교회 공동체는 전체적으로 보아, 예수의 뜻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예수의 말씀을 전달해 나아갔고, 적어도 단초적으로는 그것을 실현했으며, 그리하여 영구히 교회 안에 유산으로 남아, 장차 만대에 걸쳐 인식될 수 있게 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수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비전이 어떻게 기원후 1세기부터 3세기까지의 소위 교부시대의 고대교회로 정착되어 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단초적인 데서 그칠 수밖에 없는데, 이는 신약학자로서의 다룰 범위가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히 요약해 보자면, 처음 신약성서의 공동체들은 대개가 아직은 본궤도에 이르지 못하고 좀 떨어진 채 시운전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아직 완전한 궤도를 잡지 못했던 이념과 구조들이 교회와 교의의 계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궤도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1세기에는 역시 많은 부분들이 아직 시험단계에 있었고, 그래서 많은 초창기의 유토피아가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입증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위 “대조사회”라고 일컬어 온 전통, 곧 신앙 면에서의 날카로움과 세상 앞에서의 어리석음은 원초 교회를 훨씬 넘어 3세기에까지 이어져, 고대교회의 모습에 명확히 새겨지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초기 교부들의 기도서나 서신들을 연구해 볼 때, 예수의 제자 공동체에 대한 비전은 고대 교회에까지 구체적으로 잘 전승되어지고 있었다. 고대 교회는 첫째는 “만민 속의 선민” 개념을 계속 견지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로 선택된 백성이므로 따라서 교회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각별한 공동체 의식이 고대 교회의 시대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둘째로, 고대 교회는 “치유의 종교”로서 계속 남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가 쓴 편지에 병자의 치유를 위한 기도에서 보듯이, 예수의 치유사역에서 시작하여 사도들의 선교과정을 거쳐 고대 교회에까지 그 치유의 전통이 고스란히 내려 왔다. 셋째로,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형제적 유대”를 잘 간직한 교회이었다. 클레멘스의 편지, 미누치우스 펠릭스의 대화록, 고린도의 디오니시오스의 편지에서 보듯이 형제애가 그리스도교의 특유한 점으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넷째로, 고대 교회는 “하나님의 대조사회”로서 그 명맥을 계속 이었다. 예를 들어 아리스티데스의 호교론에 보면, 고대 교회의 신도들은 이교도 사회와는 너무도 대립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고, 이방 사람들의 야유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아름다운 선행을 이어간 당시의 교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섯째로,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거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회이었다. 예를 들어, 마누치우스 펠릭스의 ‘옥타비우스’에서 보는 대로, 이교도들의 비난과 당시 사회의 대한 그리스도인의 거부 자세는 너무나 단호하였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검투 경기나 야수 싸움을 구경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행열과 행진에 참여하거나 황제 축일에 잔치에 참여하는 것들도 금지되어 있었다. 여섯째로, 고대 교회는 “교회와 전쟁”에 있어서 그 구분이 분명하였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종사하기를 거부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 군인이 황제숭배에 연루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라기보다는 교회는 거룩한 사제적 백성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피로 얼룩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하였다.


일곱째로, 고대 교회는 “이사야 2장의 성취”를 비전으로 바라보았다. 즉, 교회의 비폭력성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는 교회 실존의 가장 깊은 핵심 문제이며, 교회의 주인인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폭력을 단념하고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것 사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일반 사회에서의 지배의 추구, 폭행의 충동, 끝없는 적대관계를 극복하고, 이사야 2장의 비폭력적인 새 사회질서를 구축하기를 지향하였다. 즉,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고 한 이사야서 말씀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여덟째로, 고대 교회는 “실천에 의한 진리의 입증”을 추구한 교회이었다. 고대 교회는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는 필히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을 통해 빛을 발하여야 한다고 믿었던 교회이었다. 이그나시우스가 트랄레스 공동체에 대한 서신이나 클레멘스 2서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행동거지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나아가 고대 교회는 교회가 온전히 교회로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고 있었고, 교회의 생명은 죽음에서 나옴을, 따라서 언제나 생명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을 때라야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6. 마무리-“아우구스티누스 유산”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신약성서 공동체와 초기 교부들 시대에 수용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초기의 예수의 비전과 그 사역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얼마나 충실하게 또 민감하게 생각하면서 잘 수용해 나왔던가를 알 수 있었다. 그 세부적인 내용들을 다시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이러한 수용 역사가 단절이 되고 말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 교회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폭력을 삼가는 메시아적 장소라는 말을 감히 못하게 되었던가? 또 언제부터 교회는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표징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되었던가? 그것은 아마도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 나오고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신국론에서는 지상국과 신국이 뚜렷이 대비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을 당시의 교회로, 지상국을 비그리스도교적인 사회로 보았는데,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조에서는 교회와 이교도 사회가 서로 대립되어 있을 뿐, 서로 혼합되어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여지가 없게 된다. 이는 초기 교부시대의 대조 교회의 개념과는 이미 달라진 것이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나라도 오직 “저 위”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순전히 미래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사상체계는 초기 교부시대까지 잘 내려온 전통에서 보듯이 하나님 백성을 모아 여느 다른 사회를 위한 표징으로 나타낼 수 있게 한다는 그런 전통적 개념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따라서 바울이 지상의 공동체를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던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서는 온데 간데가 없어져 버렸다.


예수가 그렇게 특징적으로 힘차게 제시했던 하나님 나라의 표징적 현존에 관해서도 신국론에서는 이미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또 지금까지 초기 교부들도 저마다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과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나게 표현해 오던 것이 전통이었으나,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서는 신국이란 이미 창세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볼 뿐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 무슨 변화를 일으키리라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것이 문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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