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실천신학

기독 학생 운동사에서 본 UBF 복음사역

이창무 2015. 5. 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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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학생 운동사에서 본 UBF 복음사역


- 정모세  이 논문은 필자의 저서 및 미출판된 논문, 그리고 메모들을 박상혜님이 요약, 편집한 것입니다. 박상혜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선교사 (Chicago)


서 론


세계선교는 성경에 일관된 지상명령이며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본 이라면 성경 곳곳에 있는 하나님의 절대절명의 명령을 듣게 될 것이다. UBF 운동 역시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가운데 세계선교라는 지상과제의 사명을 영접하게 되었고 믿음으로 세계 선교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점점 영성을 상실하고 세계 선교에 대한 사명을 잃어버리고 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사라지고 십자가를 꺼려하는 인본주의 신앙이 암처럼 퍼져 나가고 있는 실정이 우리의 영적 현주소이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 UBF의 영성 역시 초창기의 뜨거운 열정과 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내외적으로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 연구는 세계선교 사명의 회복과 학원선교의 부흥의 시급성을 절감하면서 역사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성경과 역사에는 한 사회를 영적으로 부흥시키고 세계선교를 활성화시켰던 많은 기독학생운동들이 있었다. 기독학생운동의 역사적 전환점을 나누는 견해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저자는 대학에서의 기독학생운동이 활성화된 18세기를 기점으로 시대를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8세기 이전의 기독학생운동은 성경시대의 신앙인물들, 초대, 중세 교회 시대의 수도원 운동으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이후의 기독학생운동은 영국의 홀리클럽 운동, 찰스 시메온의 캠브리지대학의 영적 각성운동, 허드슨 테일러와 캠브리지 7인, 독일 할레대학의 선교운동, 건초더미운동, 미국학생자원선교운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기독학생운동사의 관점에서 UBF 운동을 평가하고 현재 문제를 진단하며 21세기에 나아가야할 방향을 간략히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에 앞서 ‘기독학생운동’이란 용어의 정의를 먼저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이란 원래 신․구교를 통칭하는 것이지만 본 연구에서는 16세기 루터,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따르는 개신교를 지칭한다. ‘학생운동’이란 학원선교가 결실을 맺어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서 교회의 성장과 부흥, 선교, 사회 문화 영역에 걸쳐 두루 영향을 미쳤을 때를 의미한다. 또한 ‘학생’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본 연구의 한계를 밝혀둔다. 대학(University)은 15세기에 들어서 생긴 단어이므로 그 전에는 ‘학생’이 아니라 ‘청년’이란 개념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대학에서의 복음운동이 활성화되기 이전에 젊은이들 가운데 일어난 복음운동은 ‘기독청년운동’이라는 명칭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수도원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필자는 ‘기독학생운동’이라는 용어를 18세기 이전의 수도원에서 일어난 청년운동에까지 확대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주 대상이 UBF운동인 만큼 UBF 이외의 기독학생운동들은 극히 제한적인 개관에 만족할 것이다. 더 나아가 UBF 운동 중에서도 선교사 파송에 따른 이민구조 변화현상이나 문화에 미친 영향, 자녀들의 교육문제, 일반 목회나 대중선교로의 방향전환 등 파생되는 여러 문제들은 거의 다루지 않을 것이며 학원선교와 평신도 선교사 파송 중심의 역사만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1. 18세기 이전의 청년운동 개관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이며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따라야할 삶의 절대적인 지표이다. 우리가 고찰하고자 하는 청년운동 역시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 타당성을 입증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성경 어디에도 특별히 청년(학생)을 지목하여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문자적인 명령은 없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청년 한 사람을 지목하시고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키우신 많은 예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에 나타난 청년운동의 예를 들어보자. 구약의 인물들 가운데는 요셉, 모세, 다윗과 다니엘, 사무엘, 엘리야 등이 젊은 시절부터 사람 막대기와 인생채찍으로 연단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았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과 12제자들 그리고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을 통해 제자양성의 중요성과 동역의 중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한 사람의 영적 지도자 양성으로 시작되어 어두운 시대를 영적으로 밝히며 역동적인 제자훈련을 통해 세계복음화의 대명제를 이루어가신다. 

근대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인 18세기 이전에는 대학의 역할을 수도원에서 담당했다. 청년들은 이 곳에서 함께 모여 성경을 연구하며 말씀 중심적인 삶에 전념했다. 수도원은 일생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그 삶을 본받기 원했던 청년들이 모여들면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신앙생활공동체였다. 초대교회의 수도원 운동은 4세기경 이집트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파코미우스(290-347)가 세운 타벤니시 수도원의 경우 9,000여 명의 독신 청년들이 모여 살면서 기도, 친교, 노동, 완전한 가난, 선배 수사에 대한 의심없는 순종 등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서방수도원 운동은 어거스틴의 회심과 함께 동방 수도원 운동이 서방으로 도입된 것이다. 

 쟝 그리보몽, 수도원 운동과 금욕주의, <기독교 영성 (I)> 버나드 맥긴 편 (서울: 은성, 1997), 173.


중세 교회의 대표적인 수도원 운동으로는 성 버나드의 시토 수도원, 성 프란시스의 탁발수도원, 후르테의 공동생활 형제단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버나드(1090-1153)는 수도원을 개방하여 일반 사람들에게도 청빈과 헌신을 가르쳤는데 심지어는 창녀들에게도 수도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James Huston, 클레르보의 버나드와 두 친구, <하나님의 사랑>, 심이석 옮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25. 

 명훈련관으로 알려진 버나드 곁에는 실력있고 겸손한 젊은이들이 몰려들었고 제자들 중에는 훗날 교황(유게네3세)이 된 이도 있었다. 철저한 그리스도 중심의 버나드의 경건한 삶과 복음적 개혁성은 중세 후반 12세기 기독교계 뿐 아니라 세상의 위정자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쳤다. 또한 버나드의 성경 중심의 개혁사상은 후대의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Dennis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12세기 교회의 영성이 둔화되고 성직자들이 상류층으로 군림하면서 세속화되어갈 때 프란시스(1181-1226)의 ‘작은 형제들’ 수도원 운동은 관료적이지 않은 순수 복음운동으로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프란시스는 틀에 짜인 규율을 거부하고 홀로 복음을 전파하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았다. 또한 다른 수도원과 달리 직접 일하여 생계를 해결하였으며 완전한 무소유를 주장했다. 조직적이지도 않고 근엄한 규칙도 없는 가운데 자연스런 사랑으로 운영되는 그의 수도원 운동은 한마디로 ‘천진난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도원이 커짐에 따라 프란시스의 의도와 달리 수도원은 재산권을 갖게 되었고 조직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프란시스의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사랑과 소박함, 무소유의 정신은 후세들이 배워야할 좋은 귀감이 된다. 하지만 한 교단의 최고 리더로서 그의 천진한 방식은 커다란 조직을 운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모임이 커지면 조직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며 이는 마치 필요악과도 같은 것이다. 건전한 제도화가 이루어질 때 조직의 비대함에 따른 비효율성과 부패를 방지할 수 있고 모임의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르테(1340-84)의 공동생활 형제단은 자율적인 생활방식, 진지한 토론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는 학문 풍토를 고양시킴으로 교리적, 관료적 행정 체제를 지닌 교황청과 명백히 대비되었다. 형제단의 수사들은 성경과 기독교 고전을 연구하고 필사본을 만들어 대량공급함으로 르네상스 기독교적 인문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활발한 교회학교 운영을 통해 오늘날의 중등교육 제도의 기초를 이루었다. 

이상에서 수도원에 대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수도원은 개신교 이전까지 복음적 청년 운동의 근거지로서 청년들의 영성 훈련, 학문 활동이 주로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수도원 운동은 ‘경건생활’, ‘복음중심주의’, ‘말씀공부’ 등을 통해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순수한 신앙운동이었다. 그들은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믿음을 드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수도원 운동은 훗날 종교개혁을 비롯해 영적으로 후대에 깊은 영감을 주는 많은 영적 유산을 남겼으며 외적으로는 사회 문화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회에서 감당할 수 없었던 고대 문헌 정리, 병원 및 학교 역할을 담당했고 청년 교육의 초석을 놓고 대학 태동의 밑거름이 됨으로써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수도원 운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역사창조는 거창한 이론이나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배우는데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수도원 운동과 18세기 이후 기독학생 운동은 서로 만나는 점이 있는 것이다. 

10세기말부터 12세기 사이 유럽은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게 되었다.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성의 향상, 상공업의 발달로 도시들은 부유해졌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양과의 학문․경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부유해진 도시민들의 욕구는 지적 운동으로 분출되었고 1158년에는 이탈리아에 유럽 최초의 볼로냐 대학이 건립되었다. 이 시기의 프랑스 파리대학, 영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대학은 신앙과 지성의 공동체로서 청년들을 토론의 장으로 안내하면서 지적 자주성과 사유의 다양성의 시대를 열어갔다. 대학은 종교개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칼빈은 제네바학당에서 동역자들을 양성하고 훈련시켰다. 이러한 대학의 풍토 가운데서 종교개혁의 씨앗은 성장할 수 있었고 개신교가 안정된 후인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대학 내외에서 기독학생 운동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2. 18세기 이후의 학생운동 개관

18세기 이후의 학생운동은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의 홀리클럽, 캠브리지대학의 찰스 시메온, 캠브리지 세븐, 미국의 건초더미 학생운동과 학생자원 선교운동(SVM) 등의 흐름을 따라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1) 옥스퍼드대학의 홀리 클럽 운동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홀리클럽은 1729년 옥스퍼드대학생이었던 챨스 웨슬리 한 사람이 자신의 신앙 성장과 경건 생활을 위해 만든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와 같은 이들이 합세하면서 모임은 활기를 띠고 체계를 잡게 되었다. 옥스퍼드의 청년들은 함께 모여 열정적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서로의 신앙을 북돋우며 봉사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명한 결단 가운데 새벽 5시에 일어나 엄격히 규정된 일과를 시작했으며 기도, 금식, 금욕의 강훈련을 감당했다. 

 Richard Heitzenrater, Wesley and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5), 39.


하지만 당시 영국은 영적 안일에 빠져 쾌락과 허영, 자기 과시, 영적 무지와 게으름에 깊이 젖어 들어가고 있었고 인본주의적인 자연철학, 계몽주의, 무신론 등이 득세하고 있었다. 형식만 남은 영국 교회와 세속적인 출세욕과 쾌락에 젖어 있던 옥스퍼드대학생들에게 홀리 클럽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홀리 클럽의 방법이 지나치게 열광적이고 엄격하다고 비판했고 비꼬는 의미로 “홀리 클럽”, “규칙 주의자”라고 불렀으며 심지어는 정신병자들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홀리 클럽의 운동은 성경 중심적이고 신본적인 영성훈련 운동이었으며 영국교회사는 물론이고 세계선교 역사에 많은 영적 열매를 남긴 성령의 역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리 클럽의 영성 훈련이 많은 억측과 오해를 사게 된 것은 구원론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1729년에서 1735년 사이에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와 같은 홀리 클럽의 중심인물들의 신학을 살펴보면, 당시 홀리 클럽은 믿음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성화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율법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A. K. Walker, William Law, His Life and Work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973), 96. Chichten Mitchell, Charles Wesley (Kansas city: Beacon Hill Press, 1994), 38.

 그들의 신학 속에는 복음의 은총과 성령의 사역이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구원론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화론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에게 물에서 헤엄쳐 보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리 클럽의 영성훈련이 인간적이고 완전히 율법적인 신앙으로 흐르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영성훈련이 성경 중심적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홀리 클럽의 ‘규칙주의’(Methodism)는 이 모임이 남긴 중요한 유산이다. 홀리클럽이 영성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홀리 클럽의 규칙주의는 그들이 일생 하나님께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비결이었다. 홀리 클럽은 구원의 은혜를 감당하고자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인 성경적 성화론을 구현시켰던 것이다.

 Frank Baker, “The People Called Methodist-Polity”, Gordon Rupp, ed. A History of the Methodist Church in Great Britain 1:249.

 이러한 성경적 영성훈련을 통해 홀리 클럽은 젊은 지성인들을 훈련시킴으로써 18세기를 이끌어간 영적 일꾼들을 배출해냈다. 또한 홀리 클럽은 복음에 기초한 범위 내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참여 활동을 펼쳐 감옥개량, 빈민구휼, 병원과 학교 설립, 노예제 폐지 등에 힘썼다. 


2) 캠브리지 대학의 기독학생운동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기독학생운동은 찰스 시메온이 이끈 성삼위교회를 구심점으로 일어났는데 캠브리지대학의 영적 각성 운동은 영국의 영적 부흥과 세계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복음적인 열정이 넘쳤던 찰스 시메온은 성삼위교회의 사역 초기에 교회 재직들에게 심한 배척을 받았고 10여년 동안 다른 목회자에게 밀려 주일예배 메시지도 전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겪었다.

 Hugh Evans Hopkins, Charles Simeon of Cambridge (Grand Rapids: Eerdman, 1977), 44.

 찰스는 배척받는 괴로움이 사무쳤지만 사표를 내거나 다른 교구로 이동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기다리며 사랑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려고 했다. 이 때 배운 인내와 겸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목회가 영적 열매를 맺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Ibid., 81.


시메온 당시 영국 국교회는 영적으로 매우 침체되어 있었고 목회자들은 성직을 일신의 영달을 꾀하기 위한 하나의 직업으로 여겼다. 이렇게 무기력하고 생명력이 없었던 영국 국교회 가운데 찰스 시메온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복음의 중요성을 강력히 설파한 메시지를 통해 새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반과 토론반을 운영하며 미래의 목회자들에게 분명한 소명의식을 심고 영적으로 훈련했다. 시메온의 학생사역을 통해 많은 영적인 목회자들이 양성되었고 그들은 영국 국교회를 영적으로 쇄신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시메온의 복음 중심적인 목회철학과 영적인 목회자 양성은 형식만 남아 있던 영국 국교회를 영적으로 변화시켰다. 시메온은 결혼도 포기하고 인생의 전부를 대학생들에게 쏟아 부었다. 그의 헌신으로 캠브리지대학생들이 영적으로 깨어났을 때 수많은 젊은이들이 선교에 눈을 뜨고 인도와 페르샤 등의 선교사역에 헌신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3) 허드슨 테일러와 캠브리지 7인의 선교운동


허드슨 테일러는 17세 때 거듭난 이후 구원받지 못한 중국의 영혼들에 대한 상한 심정으로 불타올라 중국 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다. 그는 선교 동역자를 모집하고 훈련하기 위해 체계적인 선교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CIM)를 설립했다. CIM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파나 성별, 학력을 초월해 영적 자질이 있어야 했으며 물질자립의 믿음이 필요했고 중국인들과 함께 거하며 중국 옷을 입고 중국말로 말해야했다.

 Steer, Hudson Taylor (상), 219-20. Stephen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New York: Penguin Books, 1984), 333-34.

 이러한 영적이고 개방적인 허드슨의 선교 사역은 캠브리지대학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캠브리지대학생들은 무디의 전도집회를 통해 영적으로 각성된 상태였다. 이들 중 보샴, 카슬, 스터드 등 캠브리지대학생 7명이 허드슨의 사역과 선교 비젼에 감명을 받고 CIM에 가입했다.

 John Pollock, The Cambridge Seven (서울: 성경읽기사, 1987), 66.

 상류층 자녀들이었던 캠브리지 7인이 중국 선교사로 결단한 것은 사회적인 화제거리였으며 영국은 물론 미국 대학가를 영적인 열정으로 뜨겁게 했다. 미국의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SVM)도 캠브리지 7의 선교에 자극을 받아 일어난 운동들이었다.

 John Pollock, The Cambridge Seven (서울: 성경읽기사, 1987) 159.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운동은 대학 내 영적 각성에 주력한 것이 아니라 중국, 아프리카 등지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한 평신도 자비량 선교운동이었다. 하지만 영적으로 준비된 대학가의 젊은이들은 테일러의 기도와 믿음에서 나오는 단순하고 정직하며 생명력있는 CIM 사역에 열광하였다. 허드슨과 캠브리지 7인의 선교는 잃어버린 양을 간절히 찾는 목자의 심정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의 선교였으며 대학가의 최고 지성인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변화시킴으로 세계선교 역사에 큰 공헌을 하였다. 


4) 독일 경건주의 운동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랜 투쟁과 시련을 거쳐 마침내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를 통해 결실을 맺는다. 이후 개혁파들 사이에 수많은 교리 논쟁이 오가면서 각 종파마다 신조가 만들어지고 거대한 교리체계가 생겨났다. 개신교들은 정통 교리를 확정하고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전란(30년 전쟁, 1618-48)에 지치고 상처입은 독일 영혼들은 영적으로 갈급했지만 굳어진 정통주의 신학은 이들을 치유하기에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17세기 후반 유럽에는 자연과학과 철학에 근거한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거세게 기독교에 도전해 왔다. 이런 시대 분위기 가운데 독일의 경건주의 선교운동을 통해 영적 각성의 물결이 사회 전방으로 퍼져 나갔다. 

 Albrecht Ritschl, Geschichte des Pietismus (3 Bde.; Bonn, 1880-86). Karl Barth, Church Dogmatics, tr., G. W. Bromiley (Edinburgh, 1962), IV/3/2. Koppel Pinson, Pietism as a Factor in the Rise of German National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1934).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스페너, 프랑케, 진젠도르프와 같은 독일 경건주의자들과 할레대학의 기독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라 불리우는 스페너는 루터교 정통주의 신자인 가정에서 성장하였지만 청교도 베일리의 『경건의 연습』, 아른트의 『참된 기독교』와 같은 신앙서적을 탐독하면서 교리적인 차원을 넘어선 경건한 삶과 성화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목회를 하는 가운데 영적 소원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 안의 작은 교회’ 또는 ‘경건의 모임’과 같은 소수 정예 제자양성을 시작했다.

 스페너에 관한 연구물은 다음과 같다. James Stein, Philipp Jacob Spener: Pietist Patriarch (Chicago: Covenant Press, 1986). Kurt Aland, Spener-Studien (Berlin: Walter de Gruyter & Co., 1943). Marie Richard, Philipp Jakob Spener and Auguest Hermann Francke (Philadelphia: Lutheran Publication Society, 1897). Ernest Stoeffler, The Rise of Evangelical Pietism (Leiden: E. J. Brill, 1971). Dietrich Schmidt, “Philipp Jakob Spener und die Bibel”, Pietismus und Bibel, Kurt Aland, ed. (Witten: Luther Verlah, 1970): 9-58. Martin Schmidt, “Spener und Luther”, Luther Jahrbuch (Berlin: Lutherische Verlagshaus, 1957), 24:102-29. Johannes Wallmann, “Pietismus und Orthodoxie”, Geist und Geschichte der Reformation, Kurt Aland, Walther Eltester, eds. 418-41.

 스페너의 ‘교회 안의 작은 교회’운동은 평신도들도 성경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성경과 일반 성도 사이의 벽을 허물었고 평신도에게 전도와 기도 등 영적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또한 허심탄회하게 자기 문제를 이야기함으로써 풍성한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리고 경건 생활을 위해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며 당시 독일 교회들이 허용했던 극장 관람, 카드놀이, 사교춤 등을 엄격히 금지했다. 

스페너의 후계자로 알려진 프랑케는 라이프치이대학에서 동료 강사들과 함께 소그룹 성경 연구반을 만들었다. 성경을 짧지만 깊이있게 공부하고 개개인의 삶에 적용시키는데 역점을 두었을 때 성경 공부반은 대학 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교수들의 모함으로 프랑케는 학교를 사직하게 되고 함께 쫓겨난 교수 몇 명과 새롭게 생긴 할레대학에서 가르치게 된다. 

프랑케의 할레대학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스페너-프랑케식 경건훈련을 받는 학생들이 6,000여 명에 이르렀고 덴마크-할레 선교회가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할레대학은 루터파 교회들을 복음 중심적으로 변화시키는 경건주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James Nichols, History of Christianity (New York: Ronald Press, 1956), 84.

 교회사가 슈미트는 프랑케가 성공한 이유에 대해 할레대학이 기존의 학풍이 없는 처녀지였다는 점, 사람들의 반발과 불의에 부딪히는 가운데 프랑케의 내면이 성숙해졌다는 점, 목사와 교수 직책을 동시에 맡은 행운이 따랐다는 점 등으로 꼽았다.

 Martin Schmidt, Pietismus (Stuttgart: Verlag W. Kohlhammer, 1972), 69.  Gary R. Sattler, God’s Glory, Neighbor’s Good (Chicago: Covenant Press, 1982), 46.

 프랑케는 교수와 목회 사역 외에도 고아원, 성경 연구소 등 여러 기관을 열정적으로 섬겼는데 이 기관들과 할레대학을 통해서 60여 명의 선교사가 배출되었다.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 Charles Scribner, 1970), 448.

 


5) 모라비안 선교운동


귀족출신인 진젠도르프는 집안과 친분이 있었던 스페너의 감화를 받아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이 돈독했으며 프랑케가 세운 학교를 다니면서 영적인 열정이 충만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유능한 지도력과 학식, 부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능력은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면서 발휘되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14세기 종교개혁자인 존 후스(John Huss)의 영적 후예로서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베르텔스도르프까지 오게 되었다.

 후스 추종자들은 핍박(逼迫)을 피해 이곳 저곳 숨어다니다가 1457년경에 쿤발드(Kunwald) 마을 리티쯔(Lititz) 성에 숨어 들어왔다. 이들 모임이 모라비아교회 전신(前身)인 형제회(Unitas Fratrum, The United Brethren)이다. 형제회(兄弟會)는 1467년경부터 자체 내에서 성직자를 세워 카톨릭과 제도면에서도 완전히 분리(分離)했으므로 계속해서 혹독한 시련(試鍊)과 핍박(逼迫)을 받아야만 했다. 1519년 루터의 종교개혁 나팔이 불기전 이들은 이미 200여개의 개신교 공동체를 가질 수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 형제회는 조금 안정된 분위기를 누릴 수 있었으나 유럽 30년 전쟁(1618-48)으로 다시 무서운 핍박을 받게 되었다. 형제회 회원들은 광산(鑛山)이나 토굴(土窟)로 투옥되거나 아니면 부근의 삭소니, 살레지아, 헝가리, 네델란드, 프러시아 지역등으로 피신해야 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영지 내에 모라비안 교도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모라비안 루터파 교회를 이끌었다. 독일 루터파 교단은 진젠도르프의 모라비안 공동체에 대해 교회의 분리를 조장한다고 비난했지만 사실 진젠도르프는 스페너나 프랑케와 마찬가지로 독일 루터파 경건주의자였다. 그의 목적은 형식적인 루터파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켜 초대 교회의 이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모라비안 공동체의 생활을 보면 나이, 성별, 결혼 여부 등을 참작하여 교인들을 여러 조로 편성하고 각 조마다 영육간에 지도력있는 지도자를 임명하여 의식주를 공동으로 해결하고 노동과 신앙교육을 철저히 지켰다. 영적인 결혼을 위해서 지도자들이 제비뽑기로 배우자를 결정할 때도 있었는데 이러한 결혼관은 진젠도르프 공동체가 이단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진젠도르프는 결혼을 매우 중시했고 모라비안들은 독신생활을 거부했다.

  Herrn Hut 용어는 Unter des Herrn Hut (under the Lord’s watch) 또는 Auf des Herrn Hut (on watch for the Lord)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J. T. Hamilton and Kenneth G. Hamilton, History of the Morabian Church (Winston-Salem: Morabian Church in America Press, 1783), 24.

 모라비안 공동체의 결혼관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부였다. 그러나 진젠도르프가 소신껏 일할수록 비난의 소리가 높아져 1736년 그는 작센정부에 의해 추방되었다. 

1737년 진젠도르프는 베를린에서 모라비안 감독으로 안수받고 세계선교에 집중했다. 모라비안 교회는 공동체 회원 60명에 1명 꼴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평신도 선교사들은 선교사역을 감당할 뿐 아니라 의식주는 물론 선교 사역에 드는 제반 비용도 자립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모라비안들은 언제 어느 때라도 목숨을 바쳐 선교 전선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1732년 버진 아일랜드, 1733년 그린랜드, 1734년 북미, 1735년에는 남아프리카가 개척되었다.

 Ruth A. Tucker, From Jerusalem to Irian Jaya (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3), 69-74, 77, 80-81.

 진젠도르프의 업적과 활동에 대해 프러시아, 영국 등에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리게 되었고 작센 정부로부터도 추방명령이 취소되어 자유롭게 사역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 경건주의는 삶을 변화시키는 신앙이요 말씀 공부를 중심으로 한 훈련과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실천에 옮긴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스페너, 프랑케, 진젠도르프로 이어지는 독일 경건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긍정적인 면은 첫째로, 경건주의에 기초한 교회 부흥과 선교 운동은 18세기 무신론적 합리주의에 도전했다. 둘째로, 교파나 교단을 초월해 기독교 연합운동을 전개하였고 독일과 미국의 루터파 교회를 쇄신시켰다. 셋째로, 경건주의 평신도 자비량 선교활동을 활성화시키고 루터의 만인 제사장주의를 부활시켰다. 넷째로,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이루었으며 다섯째로, 교회음악을 자국어로 쓰도록 했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첫째, 독선과 신비주의적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말기에 들어 신학자 리츨이나 바르트가 지적한 대로 신비주의‘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스페너, 프랑케 등은 말씀 중심의 체험 생활을 강조했으며 오히려 신비주의를 위험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말씀에 근거한 신앙 체험이란 말씀을 붙들고 투쟁하는 것으로서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것을 보려고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로, 교회에 내려오는 전통적인 교리를 무시함으로써 교회 내에 온갖 사상들이 신학적 통제없이 침투할 위험성이 있었다. 셋째로, 체험신앙을 강조하고 합리적 이성의 영역을 지나치게 축소시킴으로 반지성주의로 전환될 우려가 있었다. 다섯째로, 경건주의 운동이 독일 민족주의의 연장이라는 평가가 있지만 이는 설득력이 없다.

 Koppel Pinson, Pietism As a Factor in the Rise of German Nationalism (New York : Columbia University, 1934), 7-206.

 


6) 건초더미 기도운동


미국에서는 건초더미 기도운동(Haystack Prayer Movement)의 사무엘 밀즈 2세(Samuel Mills Jr., 1738-1818)가 등장하면서 기독학생 운동이 시작된다. 사무엘 밀즈는 미국 윌리암스대학에서 20명 남짓 참석하는 작은 기도모임을 만들고 기도하던 중 불가능에 도전하는 세계선교 비젼을 덧입었다. 그는 형제회(A Society of Brethren)를 세워 수 백명의 선교사를 배출했으며 미국 기독교계가 세계선교에 눈을 뜨게 하는데 앞장섰다.

 David Howard, Student Power in World Mission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9), 153.

 사무엘 밀즈의 선교 활동은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소원만 있다면 선교의 문은 열릴 것이다”라는 믿음에서 시작했고 그 믿음으로 승리했다. 

형제회는 해외선교에 관심과 흥미를 심고 해외선교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선교사 지망생들을 모으고 키우고자 했다. 또한 밀즈는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로서 미국 해외선교회를 발족했는데 이는 미국 최초의 선교기관이었다.

 Joseph Tracy, History of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New York: M. W. Dodd, 1842), 26. David Howard, Student Power in World Mission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9), 77.

 곧이어 다른 개신교 교단들도 선교회를 창립하여 선교사역을 지원했다. 밀즈는 선교사의 파송과 지원, 미국 내 선교의 시급성 등으로 인해 직접 선교사로 나가지 않고 선교에 관한 정보와 선교 후보 교육에 봉사하였다. 또한 국내 선교 사역에 헌신하여 군소 성경공회들을 미국 성경공회로 단일화시킴으로 성경이 조직적으로 미국 전역에 배포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밀즈의 형제회는 기독 학생들의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조직적인 선교기구의 시초였고 선교 문제에 관한 안내협회는 선교 후보 교육, 선교지에 대한 정보 제공 등 해외선교를 체계화시켰다. 밀즈가 세계 선교와 국내 선교를 향한 원대한 비젼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을 늘 사모하였고 말씀에 기초해서 생각하고 기도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밀즈는 겸손하고 온유한 지도력의 소유자로서 다른 기독교 지체들과 조화로운 연합을 이루었다.

 “Mills desired to be unseen in all his movements on this subject, which, I am well persuaded, arose from his unaffected humility, never desirous to distinguish himself, but to induce others to go forward.” Tomas Richards, Samuel J. Mills: Missionary Pathfinder, Pioneer and Promoter, (Boston: Pilgrim Press, 1906), 38. Keith J. Hardman, The Spiritual Awakeners (Chicago: Moody Press, 1983) 153.

 이 것은 미국 교회가 선교부를 창설하고 해외선교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7) 미국 학생자원 운동


미국 내에 개별적으로 성장해오고 있던 YMCA, 프린스톤 선교회 등 여러 학생 운동들은 헐몬산 수양회를 계기로 서로 연합하면서 범사회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John Mott, Five Decades and A Forward View (New York: Harper, 1939), 3. David Howard, Student Power in World Mission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9), 162.

 헐몬산 수양회는 무디가 학생들에게 선교 비젼을 심어주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는데 학생들은 이 곳에서 해외선교에 도전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피어선 박사의 설교를 듣는 가운데 세계 선교를 일생의 소명으로 영접했다. 믿음과 열정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한 소명의식이 없었던 미국 학생들에게 세계선교는 확고부동한 좌표를 제시했던 것이다. 

헐몬산 수양회 이후 학생들의 세계선교운동을 위해 북미 학생 운동을 주도할 공식적인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미국 학생자원 선교운동(SVM)이 탄생되었다. SVM이 생기면서 미국의 학생자원 선교운동은 체계적이고 강력한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SVM은 “세계 복음화는 우리 세대에”란 원대한 비젼 아래 모여든 학생들의 자발적인 세계 선교 운동이었다. SVM의 목적은 선교 자원자들을 훈련시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 선교사가 나의 목적이다”는 선언문에 서명을 하고 각자 속한 교단이나 교회 선교부를 통해 선교사로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1891년부터 4년마다 국제 대표자 회의를 열어 SVM의 활동을 점검했는데 1910년 에딘버러 회의에서는 4,346명이 중국, 인도, 아프리카, 일본, 남아메리카 등의 선교사로 나갔다는 집계가 발표되었다.

 John Mott, Early History of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6 vols. (New York: Associated Press 1946), 1:31.

 국내 선교 역시 활발했는데 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1911년 미국과 캐나다의 50여 개 대학의 선교사로 파견된 자원자는 4,784명이었다고 나와 있다.

 이기문 편, 기독교 대백과사전, (서울: 기독교문사, 1981), 2: 1160-61.


그러나 SVM은 1920년 절정기를 고비로 급속히 쇠퇴하였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절대성 상실과 선교 지상 명령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초기 SVM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따르는 것,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을 철저히 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선교에 대한 불타는 사명감과 구체적인 헌신이 있었다. 그러나 후기 SVM은 초기 지도자들의 방향과 목적을 상실하고 현실적인 타당성과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이 논의했고 선교비젼도 없었다. 복음보다는 경제 개발, 국제 평화, 사회 정의와 인종 차별과 같은 문제들에 몰두했고 성경을 연구하지 않았고 전도의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초기의 선교 열정과 비젼을 잃어버린 SVM은 다른 기독 단체에 흡수되었다가 결국 1969년에 해체되었다. 

SVM은 말 그대로 학생자원 운동이었다. 한사람 한사람의 영적 소원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면서 선교 비젼이 싹텄고 성령의 힘을 덧입어 마침내 온전히 자기를 희생하는 선교의 바다로 나가게 되었다. 이와 같이 SVM의 자발성에서 하나님의 일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또한 SVM은 1894년부터 20년동안 선교 지원자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선교사들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켰다. 


요약하면 성경의 시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기독학생운동사를 통해 시대가 바뀌어도 구원역사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구원 역사에 쓰실 사람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셨다는 것이다. 기독학생운동사에 나타난 영성훈련의 특징은 성경에 기초한 엄격한 훈련이었고, 훈련의 주체자가 성령이었으며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소수 정예의 제자양성이라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기독학생 운동은 세계선교라는 뚜렷한 이상과 신학적 정체성을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순교’정신으로 헌신했다. 셋째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는 조직은 성령충만했고 자발적이며 창조적이며 깨어 있었다. 항상 신속 정확하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조직과 행정체계를 유지한 할레선교회, 모라비안 선교회 등은 정체되지 않고 언제나 살아있는 복음운동의 좋은 본보기였다. 넷째로, 기독학생운동은 복음적인 교회 연합 운동에 적극 동참한 것과 평신도 선교 사역 및 문화 창달에 기여한 바가 크다. 

다음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기독학생운동사의 흐름에서 UBF 기독학생 운동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3. UBF 운동

신학적으로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UBF 운동의 창시자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그 약속의 실현인 신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역사를 이루셨고 이 역사는 사도행전에 이어 기독교 교회사로 넘어갔다. UBF 운동의 교회사적 뿌리를 역사적으로 서술해 보자. 서방교회를 통해 내려오던 초대 교회의 신앙전통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이를 체계화시킨 칼빈주의로 이어졌다. UBF신학은 칼빈주의 이후의 개신교의 여러 분파 중에서도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청교도신앙과 관련이 깊다. 이후 이 청교도 신앙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미국 청교도와 이들의 후예인 19세기 미국 개신교로 이어졌다. 미국 개신교 중에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단체는 주로 장로교와 감리교였기에 초창기 한국교회에는 이들의 신앙전통을 따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UBF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이사무엘 선교사는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배사라 선교사 역시 남장로교에서 파송되었다. 1961년 광주 남장로회 선교부의 캠퍼스 선교를 위한 협동사업 위원회는 배사라 선교사를 책임자로 세웠다. 배사라 선교사는 당시 이창우 강도사(이사무엘 선교사)와 동역하여 UBF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기독학생회’를 시작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UBF의 신학은 미국 장로교의 신앙전통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학생회’가 개척의 열기 가운데 다른 지방을 개척하고자 했을 때 장로회 선교부의 행정적인 규제에 부딪혔다. 이를 계기로 ‘기독학생회’는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장로회 선교부와 결별을 선언하였고 1963년 대학생성경연구회(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이름의 독립적인 단체로서 개척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학생성경연구회(UBF)는 대학생성경읽기회(UBF)로 한글명칭을 개칭했다가 현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로 명칭이 확정되었다. 

요약컨대 UBF운동의 신학적 뿌리는 미국 장로교, 미국 청교도, 영국 청교도, 칼빈주의, 루터의 종교개혁, 서방교회, 사도행전, 신약, 구약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하나님으로 귀결된다. 또한 UBF는 장로교의 신앙전통을 따르되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향한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보면 하나님은 일하시되 사람, 즉 준비된 하나님의 종을 통해 역사하신다. 홀리클럽의 찰스 웨슬리와 존 웨슬리, 중국내지선교회의 허드슨 테일러, 미국 건초더미기도회의 사무엘 밀즈 등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각각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 UBF운동의 비젼과 방향을 제시하고 영향력있는 운동으로 이루어 낸 이는 이사무엘 선교사이다. 

리더쉽의 측면에서 볼 때 ‘기독학생회’가 배사라 선교사를 중심으로 했다면, UBF는 이사무엘 목자의 리더쉽 아래 배사라 선교사의 동역이라는 구도로 이루어졌다. 교회사적인 관점에서 UBF의 설립자는 이사무엘 목자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는 ‘성서한국 세계선교’의 비젼, 1대1 성경공부와 일용할 양식, 소감 등의 말씀공부훈련, 장막생활, 성경강해식 메시지 등 UBF운동의 근간이 되는 기초들을 놓았다. 오늘날의 UBF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사무엘 선교사의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 넘치는 패기와 비젼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는 이사무엘 선교사를 우상화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 입장에서 그가 UBF운동에 미친 영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UBF 운동은 1960년 4.19와 1961년 5.16의 정치적 혼란기에 방황하는 한국 캠퍼스 지성인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을 가진 이사무엘 선교사와 배사라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학생운동이다. UBF 운동은 영적으로 어둡고 무기력한 시대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애쓴 캠퍼스 학생들을 중심으로 성장했다는 점, 열정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어찌하든 말씀을 순종하고자 투쟁한 점에서 옥스퍼드의 홀리클럽과 비슷하다. 오직 불타는 목자의 심정과 믿음으로 인종과 성별, 교파, 학력 등을 초월하여 세계선교역사를 이룬 점, 영적으로 거듭난 젊은이들에게 세계 선교의 환상을 심고 헌신하도록 훈련했다는 점은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나 전성기 때의 SVM과 비슷하다. 

또한 무리 중심의 대중 선교가 아니라 제자양육 중심의 소수 정예 양성을 목표로 했다는 점은 ‘교회 안의 작은 교회’가 특징인 독일 경건주의와도 맥락이 닿아있다. 이 뿐 아니라 UBF 운동에는 장막생활이나 센타 중심의 생활과 같은 공동체적 성격이 있는데 이는 초대, 중세 시대의 수도원 운동과 닮았다. 무엇보다 UBF 운동은 분명한 구원의 은혜와 사명 중심의 생활과 결혼,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 양성과 파송이라는 측면에서 진젠도르프의 모라비안과 흡사한 모습이 매우 많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모임은 성령의 감동하심과 뜨거운 열기와 비젼과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다. 


1) 개척기


(1) 개척 조상들의 삶


① 이사무엘 

오늘날의 UBF가 있게 한 UBF 세계대표 이사무엘(창우) 목자는 1931년 10월 9일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박대 가운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다. 그가 성장하던 때에 한국은 일제 통치하에서 고난받으며 많은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통치가 끝나자마자 이제는 강대국에 의해 남과 북이 갈라져 6.25 전란이 터지는 큰 아픔이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인생의 고난과 슬픔을 겪어야했던 이사무엘 목자는 절망하고 고통하는 영혼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풍성한 목자의 사랑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운명주의로 주저앉아 있던 대학생들에게 전시의 야전사령관과 같은 스피릿으로 자립정신과 비젼을 심고 그들을 영적 지도자로 훈련시킬 수 있었다. 

이사무엘 목자는 배사라 선교사와 함께 1961년 9월 광주에서 전남대, 조선대를 중심으로 대학생 복음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서구 선교사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의존심을 극복하고자 이사무엘 목자는 처음부터 UBF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 가난한 대학생들을 섬기고자 그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헌신적으로 사역을 섬겼다. 박사가 되고 싶은 자신의 꿈을 버리고 절망하고 의기소침한 대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여 도왔다. 이사무엘 목자의 불타는 목자의 심정이 어떻게 학생운동으로 성장하게 되었는가에 관해 직접 그의 글을 인용해 보자:


광주에서 일하는 동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망한 학생들의 마음 문을 여는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앞날이 심난하여 고민하다가 점차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절망병에 빠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말문이 닫히고 마음 문이 닫혀 항상 슬픈 생각과 배고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모임을 가져도 말문을 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무슨 음식을 사 준다고 하면 신이 나고 또 그들의 먹는 모습을 보면 박력이 엿보였습니다.

저는 기도 끝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먼저 소수의 지도자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을 “소위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 다음 이들의 말문을 열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심포지움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소위원회를 모집한 후 저는 말할 제목을 그들에게 주고 같은 제목을 돌아가면서 열 번씩 이야기하도록 했습니다. 이 심포지움이 계속되는 2달 동안 이들은 한 주제를 가지고 자기의사를 발표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종래에는 이들이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했던지 저는 그들을 들어주어야 하는 고난의 종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후 이들은 조금씩 생각하는 법을 배웠고 또 성경공부하는 데 재미를 붙였습니다.

 이사무엘, 편지글, 2000년 12월, 3.

 


소수정예인 소위원회 중심의 학생복음 운동 역사는 뜨거운 열기로 일어났고 이들은 말씀을 사랑하여 어찌하든 말씀에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는 투쟁을 했다. 이 열기는 곧 전국으로 뻗어나가 1964년 제주개척, 1965년 대구, 전주, 대전 개척에 이어 1966년 이사무엘 목자에 의해 서울개척이 이루어졌다. 서울역사에서는 주로 말씀 공부 훈련에 집중하여 성경공부와 소감쓰기를 장려했는데 1968년에는 자립신앙과 말씀의 기초를 쌓도록 하기 위해 일용할 양식이 집필되었다. 

이사무엘 목자의 선각자적 비젼과 뜨거운 목자의 심정과 열정을 통해 UBF운동은 학생복음 운동으로서 방향성과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이후 세계 선교 역사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방황하는 지성인들에 대한 그의 뜨거운 목자의 심정은 죽어가는 수억의 중국 영혼들에 대한 상한 심정으로 기도했던 허드슨 테일러를 연상시킨다. 


② 배사라 선교사 

UBF 역사를 말하면서 배사라 선교사의 헌신과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아름다운 미시시피강 가에서 1930년 1월 22일 태어났으며 미시시피에 있는 그의 집에는 전라남도만한 농장이 있었다.

 Louis Aldridge Hester, A Short History of Beniot (Birmingham: Birmingham Publishing Co., 1980), 

52-55.

 그는 대부호의 외동딸로서 얼마든지 세상영광과 즐거움 속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직후인 1954년 대학생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선교사로 부르심을 영접하고 제 1선교 대상국인 한국 땅에 와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 선교사들은 광주의 양림동 녹음동산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짓고 살았지만 배사라 선교사는 가난한 한국 대학생들과 동고동락하기 위해 단칸 셋방에서 잠자며 김치를 먹었다. 이런 헌신적인 생활로 인해 다른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많은 시기와 미움을 샀고 그런 생활을 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배사라 선교사는 가난하고 상처많은 한국 대학생들의 영적 어머니요 목자가 되기 위해 결혼마저도 포기하고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배사라 선교사는 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자들의 준비공부를 위해 식사할 시간도 없이 하루 17팀의 성경공부를 섬기기도 했다. 주님을 향한 그의 헌신적 자세는 많은 자매님들에게 본이 되었고 자신의 꿈과 이상에 얽매이지 않는 절대 복음신앙의 유산은 UBF 성장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여호수아, 개척기 UBF 조상들의 복음신앙과 선교정신(광주:UBF광주센타 출판), 5.

이후 <UBF역사>로 표기하겠음.



③ 전요한

전요한 목자는 UBF의 첫 학생 목자였다. 그는 가난한 과부의 둘째아들로서 전남대 의대에 입학하였는데 대학 1학년 시절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자 방황하던 중 UBF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부터 한국어 성경공부 1시간, 영어 성경공부 1시간을 6개월간 공부한 후 기독교 인생관이 진리임을 발견하고 목자가 되었다.

 전요한, "나의 인생 반생기", 미출판된 소감, 7.

 

그는 의대공부의 어려움 중에도 헌신적으로 역사를 섬기고 양들을 사랑으로 돌보았고 의대 가운데서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그의 사랑과 영향력으로 인해 당시 전남대학교 의대 정원이 80명이었는데 60명의 학생이 센타에 나와 말씀을 공부하였다. 그는 얼마나 UBF를 사랑하였던지 “다 UBF를 떠난다 해도, 심지어 이사무엘 목자님과 배사라 선교사님께서 떠난다해도 나는 UBF를 떠나지 않겠다”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었다. 당시 전요한 목자에 대해 기록한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창선 형제는 우리 모임에 6년동안 빠짐없이 참석했을 뿐 아니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양들을 깨워 보통 다섯 명씩 함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는 또 항상 섬기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는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발 정리, 의자 정리 등 마치 수위처럼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폐결핵을 앓게 되었는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모임에 나왔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 그의 건강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연하게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동역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UBF역사>, 21.



그는 후에 이사무엘 목자가 미국 선교사로 가면서 그에게 본국 총무가 되도록 권면했을 때도 두말없이 의사직을 버리고 목자의 길을 택하였다. 전요한 목자의 넓은 사랑과 소탈한 목자상으로 인해 초기 광주 역사에 주춧돌이 되고 후배들에게도 좋은 본이 되었다.

 Ibid., 5-6.

 의대의 강한 훈련을 통해 그는 평신도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고 그들의 화합과 자발적 사역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또한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부담없는 편안함으로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품고 섬겼다. 그는 특유의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 한국 UBF 역사의 전체 방향을 잡았으며 오늘날의 한국 UBF가 있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전요한 목자의 겸손하고 온유한 목자상은 미국의 해외선교회의 창설자인 밀즈를 연상시킨다. 밀즈는 매사에 다른 동역자들을 높여 주었으며 자기부인과 깊은 겸손으로 동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Richards, Samuel J. Mills, 38. Hardman, The Spiritual Awakeners, 153.

 그는 동료들과 경쟁하거나, 독선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동료들도 열심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성숙한 지도자였다. 전요한 목자도 다투기보다는 설득하고 협조하는 겸손한 지도자였기에 그의 넓은 품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④ 그 외

정요셉 선교사는 전요한 목자가 인도한 의대 급우였다. 그는 1976년 한국의 소아과 전문의직을 버리고 미국 시카고 선교사로 나아가 이사무엘 선교사가 오기 전까지 full time staff으로 시카고 역사를 섬겼다. 1977년 이사무엘 선교사가 시카고로 오자 정요셉 선교사는 평신도로 돌아가 선교사역을 동역했다. 현재 그는 환갑을 넘은 나이지만 청년의 스피릿으로 미국 대학가를 누비며 전도사역에 힘쓰고 있다. 

안마리아 선교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다.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자 질투심이 많은 그의 아버지는 그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는 밤마다 몰래 부엌에서 식모와 함께 밥을 먹어야 했고 어떤 때는 다리가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믿음의 중심을 지키고 주님을 사랑한 마리아 목자의 믿음은 오늘날까지 이 역사를 축복하신 오병이어의 역사가 되었다. 외교관인 안요셉 선교사와 결혼한 후 신혼의 단꿈을 부인하고 수년간을 서로 떨어져 양들을 섬기는 사역을 감당했다. 안마리아 선교사는 자매 스탭으로서 종로 학사회와 종로 3부 개척역사를 섬겼고 안요셉 선교사는 과테말라, 멕시코의 선교 역사를 이루는데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이 외에도 이러한 개척 조상들의 믿음과 삶을 좇아 자신의 귀한 꿈과 물질과 진심을 바쳐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을 따르는 이들이 UBF에는 수없이 많다. 이들의 희생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고난을 일일이 말하자면 이 지면이 다 부족할 것이다. 


(2) 그들의 사상


① 말구유 역사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으로서 창조주의 권세와 영광을 지니신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들고 고통받는 인생들을 위해서 그 모든 특권과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의 형상으로 오시되 말구유에 누이신 한 아기의 모습으로까지 낮아지셨다. 영광스런 창조주께서 냄새나는 말구유에 누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요 끝없는 겸손이요 교만과 허영심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주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UBF 운동은 바로 이러한 말구유 정신으로 시작되었다. 말구유에 성육하신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배울 때 상하고 병든 영혼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섬길 수 있었다. 평신도 가정들은 가정을 희생하며 낮아져 양들을 섬겼고 학생 리더들은 불편하고 초라한 장막에서 공동생활하며 예수님을 배우고 후배들을 섬겼다. 세상의 허영과 이기심에 상처받고 절망하던 양들은 이러한 UBF 공동체의 겸손과 희생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내적 치유를 받고 강건하게 되었다. 외적으로 볼 때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 안에는 놀라운 생명력과 능력이 있는 것이 말구유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물량주의, 외적 성장 위주의 대량주의 중심으로 도리어 많은 폐해를 낳고 있는 실정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말구유 정신에 기초한 UBF운동은 실로 생명력이 넘치며 내실있는 모임이라 할 수 있다. UBF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말구유 정신에 기초한 겸손과 희생의 정신이 회원들의 삶 속에 내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구유 스피릿에서 나오는 힘은 젊은이들의 심령을 변화시켜 불을 붙였고 불가능해 보이던 세계선교의 역사를 이루었다. 


②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960년대 당시 한국 교회는 서구 선교사들이 이식한 교파에 의해 나누어졌고 신학적으로 뿐 만 아니라 재정적으로 서구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 UBF는 처음부터 하나님만을 믿고 경제적으로든 행정적으로든 자립해야 한다고 방향잡았다. 

UBF가 주는 정신을 갖게 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면,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많은 양의 프린트를 할 일이 있었는데 배사라 선교사는 교육상 학생들에게 인쇄비를 거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사무엘 목자는 가난한 학생에게 무슨 돈이 있겠느냐며 부자인 배사라 선교사가 내라고 했고 이로 인해 다툼이 일어났다. 이사무엘 목자는 이 문제로 인해 밤새 성경을 보며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주는데 있는 것이었다. 이 후 그는 “문둥이같이 오그라진 손을 펴서 주는 자가 됩시다. 그리하여 축복의 물줄기를 한국으로 돌립시다”하는 구호를 외치며 학생들에게 어찌하든 주는 삶을 살며 주는 정신을 심고자 했다. 이 때부터 물질 자립을 위해 선교헌금 역사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버스 값과 식비를 아껴 헌금했고 심지어 피를 팔아 선교헌금을 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사업 역사를 통해 전국이 개척되었고 성탄 때마다 양로원과 고아원을 구제하였고 후에는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멕시코, 소말리아, 북한 등까지도 돕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미국의 원조만 의지하던 데서 주는 역사, 나의 것을 아낌없이 헌신하는 역사, 그리고 우리 나라를 넘어 세계를 위해 주는 역사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는 놀라운 역사였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학생들이 가진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그 작은 오병이어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나누어 주고자 애썼을 때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허락하셨다. 주님은 기도의 오병이어, 시간과 진심과 물질의 오병이어, 선교사 파송의 오병이어를 받으시고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UBF를 귀하게 사용하여 주셨다.

 <UBF역사>, 30.


 

③ 한 사람을 소중히 여김 - 제자양육 및 일대일 역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 25년 동안이나 그를 키우셨다. 예수님께서도 3년 동안 많은 무리들보다도 12제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성하셨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심으로 한 영혼의 소중함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성경에는 큰 무리가 회개하여 거듭나는 역사도 있지만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섬기시고 키우신 제자양성이었다. 

UBF 개척 초기에 가장 큰 기도제목은 한 사람의 주인을 허락해 주시라는 것이었다. 이는 많은 무리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제자를 키우는 것이 시대를 살리는 것이요 세계를 살리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Ibid., 21-22.

 이렇게 UBF는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인격적인 제자양성을 목표로 하였고 전요한 목자를 비롯한 UBF의 시니어 스탭  및 선교사들이 초기의 집중적인 제자양성의 열매들이었다. 

또한 한 사람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 1:1이었다. 한 사람의 문제에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갖고 섬기며 말씀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실생활 가운데 영적 성장을 이루도록 하는데 있어 1:1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성경 중심에서 나온 1:1 사상은 UBF 개척기의 중요한 사상이며 성서한국과 세계 선교 역사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④ 영적 지도자 양성

1960-1970년 당시 한국에는 정치적인 문제, 경제적인 빈곤 등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못 먹고 못 입는 가난에 대한 절망과 좌절, 지방대생이라는 열등감과 패배의식 등으로 인해 학생들은 비젼을 잃고 주저앉아 있었다. UBF 개척조상들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참다운 영적 지도자가 없는 문제인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참다운 지도자의 모델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을 제시했고 학생들로 하여금 비범한 지도자가 되도록 독려했다. 

UBF의 지도자 상은 UBF선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대학 지성인들이 성경공부를 통한 기독교적 인생관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즉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조국과 세계 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사명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Ibid., 9.

 

1964년 11월의 소회일지를 보면 지도자양성을 격려하는 메시지가 있다:


우리 소위원들도 UBF 소위원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비록 힘이 없고 사회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비극적인 가운데 놓여 있지만 세계로 향한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영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UBF지도자들이다. 고독하고 쓰라리지만 그 쓰라림 가운데서 지휘관으로서의 쾌감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UBF 역사>, 10.



이사무엘 목자는 UBF리더들을 국제무대의 영적 리더로 세우기 위해 성경공부와 독서에 힘쓰도록 했고 독서발표, 사상강연, 초청강연 등을 통해 배우도록 했다. 학과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도왔고 특히 영어공부를 강조하여 아침에는 항상 영어 성경공부반을 운영했다. 

이런 훈련을 통해 학생들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역사의식을 갖도록 하였고 시대에 대한 목자의 심정과 사명을 가진 지도자들로 자라 가는데 있어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 UBF가 제자양성을 통해 성서 한국과 세계 선교 역사를 이루게 된 원동력은 바로 초기 역사의 영적 지도자 양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bid., 11-12.

 


⑤ 선교신앙

UBF가 학생복음 운동으로 자리를 잡아 가면서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는 성경에 나타난 세계 선교 명령이었다. 성경을 뜨거운 감격을 안고 공부하다가 공관복음의 마지막 장마다 주어지는 세계 선교 명령 앞에 서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은 이북의 공산주의자들과의 접촉을 금하기 위해 민간인들에게는 여권을 발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쟁의 상흔과 가난과 운명주의 등으로 인해 울밑에서 선 봉선화와 같이 슬프고 운명적인 한국의 상황에서 세계선교라는 것은 참으로 상상하는 것도 쉽지 않은 때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세계 선교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했다. 이사무엘 선교사의 편지에 따르면 그가 선교명령을 가르치고 나면 학생들은 믿고 아멘 하며 가슴을 치며 감격했다고 한다.

 이사무엘, 편지, 2000년 12월, 4.


동남아 선교를 위해 기도하던 중 기도의 열매로 1964년 한 자매님을 탐라국인 제주도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세계선교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었고 1970년대 후반부터 서독 개척, 미국 개척의 선교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성경공부를 통해 깨닫게 된 하나님의 절대절명의 과제인 세계선교는 UBF 운동에 있어 주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였다. 


⑥ 불타는 목자의 심정

전술한 바와 같이 UBF운동은 1960년대의 혼란과 가난 가운데 깊이 절망하고 의기소침한 지성인들에게 희망을 주기위해 시작된 복음운동이다. 개척기 조상들의 심령에는 방황하는 대학생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불같이 일어났고 학생들을 돕기 위해 여러 모로 고민하고 연구했다. 이사무엘 목자는 항상 오토바이 뒤에 형제들을 태우고 다니면서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그의 메시지에는 항상 양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강조되었으며 예수님처럼 양들의 친구가 되라고 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개척기 조상들은 양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았다. 한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가장 가슴이 아플 때는 형제들 때문입니다. 여러 양들을 위해서 많이 기도하였지만 목자로서 한 영혼을 찾을 때 제일 기쁩니다. 이왕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고민해야 할 때 형제나 국가를 위해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UBF역사>, 6.


개척기 목자들은 양들에 대한 불타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기에 어떤 힘든 일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전화도 거의 없고 버스도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양들을 돕기 위해서는 직접 두 발로 뛰어 다녀야했다. 선교헌금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팔기까지 하며 온 몸과 정열을 바쳐 복음역사와 양들을 섬겼다. 약소국의 가진 것 없는 학생들이었지만 그들의 불타는 목자의 심정은 한국 뿐 아니라 세계를 삼킬 정도로 뜨겁게 타올랐다.


2) 해외선교사 파송


(1) 초창기 해외선교(1970년대)


① 독일

당시 한국 간호원들은 취업차 서독에 많이 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적으로 볼 때 민족적 슬픔이었다. 그러나 이 운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계 선교의 문을 여시기 시작하셨다. 한번은 아는 자매들이 보조간호원으로 서독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장으로 달려가 몇 명을 데려와 2일, 4일, 혹은 2주일 정도 훈련하여 서독에 선교사로 보낸 일이 있었다. 이것이 1969년의 일이었다.

 이사무엘, 편지, 2000년 12월, 7.


1972년에는 말씀 훈련과 독일어 공부를 하던 김숙철 선교사를 비롯한 6명의 간호원 선교사가 서독으로 파송되었는데 이는 정규훈련을 받고 파송된 첫선교사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1:1역사가 일어났는데 74년 스위스 수양회에는 169명이, 75년 프랑크푸르트 수양회에서는 220명이 참석함으로 상당한 성장을 이루었다.  

1978년 이아브라함 선교사가 쾰른의 지부장으로 파송됨으로써 서독 역사는 자매중심의 역사에서 형제중심의 역사로 전환되었고 기반을 확고히 내리게 되었다. 


② 미국

미국선교는 1970년부터 간호사 선교사들을 통해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1971년부터 1981년 나이아가라 여름 수양회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그보다 5년 앞당긴 1975년에 250명 정도가 모인 나이아가라 여름 수양회를 열게 되었다.

1977년 6월에 이사무엘 목자가 시카고에 파송됨으로 미국 개척 역사는 큰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1976년 아끼던 제자들 몇이 UBF를 떠나자 이에 깊이 상심한 이사무엘 선교사는 한국 땅을 뒤로하고 미국 캠퍼스 개척역사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디프로그래머(Deprogramer)단체를 통한 양들의 납치와 세뇌와 같은 말할 수 없는 아픔도 있었지만 핍박의 역사 가운데 복음의 역사는 더욱 활발히 일어났다. 육신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의 노예가 되었던 지성인들이 성경공부를 통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제자로 서게 되었고 제사장 나라, 왕같은 백성이라는 기도 제목 아래 성장하고 있다. 


(2) 1980년대-1990년대 


1990년대는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이념의 장벽이 허물어진 시대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소련에 선교사가 파송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이 때 이사무엘 선교사의 제안으로 UBF는 1985년도에 모스코바 개척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기도제목을 영접한 미국의 Jim Robchuk, Brain Wilford, July Nugent 목자들이 단기 어학 연수로 3개월간 단기 선교사들로 갔다 왔다. 1985년 세계선교보고대회를 통해 이 비젼을 영접한 황제임스, 정드보라, 김피터, 송어거스틴 선교사가 간절히 기도하고 도전하여 모스코바로 나감으로 러시아 개척역사가 시작되었다. 모스코바의 선교역사는 유치원 건물을 빌려 지난 7년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소련인들의 배타성으로 인해 쫓겨나 센타가 없는 가운데 역사를 섬기게 되었다. 현재 김스테반 선교사의 순수복음정신으로 추위와 질병과 핍박을 이겨내며 센타가 없는 악조건 가운데서도 90명대의 러시아 학생들이 성장하고 있다.

UBF 세계 선교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부터였다. UBF 선교역사는 성장을 거듭하여 1998년 자료에 따르면 86개국에 1401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이사무엘(현정), 평신도를 부른다(1), (서울: 성광문화사, 1999), 163.

 이 가운데 선교 일선에서 언어의 한계, 문화의 차이, 물질문제의 어려움, 질병 등으로 인해 고전분투하는 자비량 선교사들의 어려움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자처하며 복음의 전사로서 생명을 다해 영적 전쟁을 치르는 수많은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희생을 통해 세계 선교 역사의 새로운 역사가 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 몇 가지 예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키예프의 김베드로 선교사는 방사선의 위협 가운데서 동역자가 유산을 3번이나 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순교정신으로 양들과 역사를 섬기고 있다. 수단의 김안드레 선교사는 동역자가 질병으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는데 여름수양회 역사를 섬기기 위해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교지로 돌아가기도 했다.

 이사무엘, 편지, 2001년 3월, 11-13. 



(3) 2000년 이후


IMF 사태 이후 한국경제의 위기로 인해 일반교회에서는 선교지원비가 삭감되거나 선교 프로젝트가 취소되는 등 선교사역의 위축을 맞게 되었다.

 이사무엘(현정), 평신도를 부른다(1), 35.

 그러나 평신도 자비량 선교 역사를 지향하는 UBF 선교사역은 실직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선교에 더 큰 관심과 열기를 갖고 진행되게 되었다. IMF 이후 약 250여명의 선교동역자들이 선교지로 파송되었는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으로 떠난 이들은 현재 대부분 정착에 성공, 활발한 사역을 진행해 나가고 있다.

 이태형, “국민일보 기사”, 1999년 7월 2일 기획기사.


2000년 1월 21일 국민일보 기사에 따르면 한국 교회는 전 세계에 8,20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곳이 UBF인데 북미에 506명, 유럽에 374명, 아시아에 289명, 유라시아 116명 등 총 1,500명의 선교사를 각 대륙에 걸쳐 골고루 파송했다.

 이태형, “국민일보 기사”, 2000년 1월 21일.

 



3) 평가 


(1) UBF의 공헌


① 영적, 도적적 각성운동

UBF 운동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그대로 믿고 따르는 가운데서 일어난 운동이다. 기독학생운동사를 볼 때 어둡고 암울한 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비젼이 심겨지는 영적, 도덕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 홀리클럽이 그러했고 독일 경건주의 운동이 그러했고 SVM이 그러했다. 

UBF운동 역시 일제 강점기와 분단으로 인한 고통과 절망, 4.19와 5.16의 정치적 혼란기, 가난과 운명으로 점철된 역사의 질곡 가운데서 일어난 영성운동이었다. UBF 운동은 혼란기의 방황하는 청년학생들에게 새로운 비젼과 성경적 가치관을 심어 주었다. 절망감과 패배감으로 의기소침한 지성인들에게 성경적 가치관과 세계선교의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 아래 미래의 주인공으로서의 비젼과 영혼의 생기를 불어넣어 창조적으로 미래를 개척하도록 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의 경우, 그 나라의 청년학생들은 한국과는 다른 의미에서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부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지성인들은 20세기를 뒤흔든 모더니즘의 상대주의, 황금만능주의, 개인주의 등으로 인해 그 영혼에 깊은 상처를 받고 방황하고 있었다. 하나님에 의해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영적인 자아를 발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발견하고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절망적인 한국의 지성인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한 UBF 운동이 편협한 민족주의 운동이나 경제적인 운동으로 흘렀다면 이러한 선진국의 젊은이들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UBF 운동은 성경을 공부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기초한 도덕적, 영적 각성운동이었기에 선진국의 방황하는 지성인들도 성경적 가치관을 갖고 건실한 인생을 살도록 도울 수 있었다.  


② 문화초월 사역 - 세계선교

UBF운동은 성경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과정에서 세계 선교에 힘쓰게 되었다. 그 결과로 87개국에 15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세계선교 역사에 크게 쓰임을 받았다. UBF운동은 타문화권에 현지의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고 제자양육을 함으로 문화초월 사역에 공헌했다. 한국인과 미국인, 독일인이 인종과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아름답게 동역하며 복음역사를 섬기고 열매를 맺고 있다. 

기독학생운동사를 볼 때 어떤 단체이든지 복음을 믿고 순종하여 세계 선교를 이룬 이들은 자문화중심주의를 극복했고 선교지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내지선교회의 규정에는 중국인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중국 옷을 입고 중국 말을 하며 중국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항목이 있다. 허드슨 테일러와 CIM선교사들은 중국인과 같은 모습이 되기 위해 안전한 외국인 거주지에 살지 않고 중국인에게 셋방을 얻어 중국인들과 함께 거하며 중국인처럼 살았다. 

배사라 선교사 역시 안락하고 좋은 미국 선교사 거주지를 벗어나 불편한 셋방에서 연탄을 떼며 김치를 먹으며 양들을 섬겼다. 혹자는 선교를 문화제국주의의 온상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견해이다. 기독교는 지배의 종교가 아니라 섬김과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에 선교도 근본적으로 온유와 겸손으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편협한 민족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③ 일대일 - 인격적 제자양육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12제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인격적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도우셨다. 그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베드로 한 사람을 수제자로 키우시고 변화된 그의 영향력 가운데 복음이 뻗어나가도록 하셨다. 이처럼 1;1 양육방식은 인격적으로 사람을 도울 수 있기에 훈련의 수준을 개인에게 맞추어 개개인의 경건의 성장에 적절한 도움을 줄 수 있다. 

UBF의 유산 가운데 1:1로 대표되는 인격적 제자양육은 성경의 원칙이 현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에 있어 일반 목회에 있어 인격적 제자양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UBF가 처음 1:1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에 대한 의식은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부흥집회나 그룹 성경공부와 같은 무리 중심의 사역이 일반화되었던 시절에 UBF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1:1 역사의 기초를 놓은 것이다. 

그러나 정과 의리에 약하고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기 쉬운 한국의 정서를 생각할 때 끈끈한 1:1 관계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경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성경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와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 때문에, 정과 의리를 앞세워 행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1:1로 인격적인 제자양육을 하되 양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식의 양육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좇아 스스로 판단하고 자립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양육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학생운동사에 있어서도 이러한 인격적인 제자양육방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통신학으로 굳어진 독일에 경건주의를 통해 영성을 회복시킨 스페너-프랑케의 경건훈련은 UBF의 신앙훈련과 흡사하다. 독일 경건주의는 대학에서 소그룹 성경공부반을 중심으로 성경을 짧지만 깊이있게 공부하고 개인의 삶에 적용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교회 안의 작은 교회’를 통해 소수 정예 제자양성을 했고 평신도에게 전도와 기도 등 영적 책임을 강조하는 만인제사장 신학을 전파했다. 또한 자신의 영적 문제나 체험 등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랑과 신뢰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는 UBF에서도 강조하는 바이며 이를 통해 많은 영적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단 독일 모라비안 경건주의와 차이점이 있다면 UBF의 신학은 말씀과 성령에 의존한 이성적 합리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독선적 신비주의를 경계한다. UBF에서 강조하는 체험신앙이란 자기만이 최고의 경지를 이룬 비밀스런 영적 체험이 아니라 개개인이 성령과 말씀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④ 평신도 자비량 선교

UBF의 평신도 자비량 선교방식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며 교회사적으로도 선교의 좋은 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이 타문화권인 가나안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하나님의 방백으로 인정받은 믿음의 조상들이 있고 다니엘, 바울 등 전문직 사역을 통해 복음역사를 섬긴 인물들도 있다. 역사 속에서 찾자면 모라비안 선교회나 윌리엄 캐리와 같은 인물을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의 모형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라비안 교회는 선교열정으로 충만했고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효율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선교가 가능했다. 

평신도 자비량 선교는 복음에 대해 폐쇄적인 곳에도 진출할 수 있다는 점, 선교 비용의 측면에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다는 점, 문화적 장벽을 극복하기에 용이하다는 점 등을 들어 21세기 선교의 새로운 차원으로 기대를 받고 있다. 

1998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교회의 선교유형은 목회자 선교사 중심으로 평신도 선교사비율은 겨우 26%에 그치고 있다. 이에 비해 UBF의 평신도 선교사는 전체 1401명의 선교사 가운데 1399명에 달함으로 거의 100%에 육박하고 있다.

 이사무엘(현정), 평신도를 부른다(1), 157.

 UBF운동은 평신도 자비량 선교사역을 활성화하고 큰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교회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⑤ 공동체적인 삶 (도시 안의 준수도원)

때때로 UBF의 생활은 지나치게 엄격하고 일반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이런 비판은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UBF운동은 일반교회와 다른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UBF 공동체 내에서의 결혼을 장려하는 것, 장막생활, 센타 중심의 삶 등으로 인해 초기에는 이단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UBF의 공동체적인 삶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교회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UBF의 공헌으로 남을 것이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는 자발성 가운데 사유재산을 포기할 정도로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청교도들도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경건한 신앙생활에 힘쓰고 복음사역에 힘썼다. 모라비안 교회는 헤른후트, 즉 주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공동생활장소에서 매일 예배를 드리며 의식주를 공동으로 했고 영적인 결혼을 장려했다. 어떤 학자들은 모라비안 공동체의 성격을 개신교적 수도원주의(Protestant monastic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Charles Scribner, 1970), 451

 

UBF의 공동체적인 생활은 도시 안의 준수도원과 같이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룬다. 이는 성경적인 것이며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이 시대를  거스르는 절대 복음 신앙의 훌륭한 유산이다. 


⑥ 복음신앙

UBF 성경공부의 특징은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고 절대복음신앙에 기초한 실천을 강조하는데 있다. UBF의 복음신앙은 처음부터 분명했는데 배사라 선교사는 성경공부 인도자가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말씀을 인도하는 자는 십자가와 부활, 즉 핵심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를 기초로 인도자는 자기 말과 사상을 전하기보다 배우고 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상대방이 마음문을 열도록 도와주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1966년 2월 5일) 

 <UBF 역사>, 13.



깊이있는 성경공부를 통한 절대복음신앙은 회원들이 성경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했다. 상대주의의 누룩이 암처럼 퍼지고 있으며 신앙의 근간을 흔드는 이 시대 가운데 절대복음신앙을 갖고 성경을 단순하게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UBF의 큰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영적으로 안일하고 타락한 영국사회에서 홀리클럽이 분명한 복음신앙을 갖고 성경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초창기 UBF도 홀리클럽처럼 정신병자나 광신자처럼 취급을 받았으며 율법적이고 과도한 열성을 지녔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초창기 홀리클럽의 신학이 구원론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율법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과 달리 UBF의 신학은 구원론과 성화론이 분명하다. UBF의 소감을 들어보면 죄사함을 받는 개인적 구원의 체험을 기초로 성화에 힘쓰는 단계로 성장하고자 투쟁한다. 


⑦ 소감 신학

UBF 성경공부의 특징은 실천적이며 고백적인 것인데 이는 소감의 영향력 때문이다. UBF운동에 있어 소감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UBF 소감신학에 대하여 고광필 교수는 이렇게 정의한다:


UBF에서 소감발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고백하고 그 고백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재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소감을 통해 기독교 공동체로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소감을 들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감각에 기초를 둔 삶을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감각은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잡을 수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다.

 고광필, 자아의 탐색, (서울: UBF 출판부, 2001), 243.



UBF 소감은 감각에 기초한 인생을 살아오던 대학생들에게 지성에 기초한 영성을 개발하도록 함으로써 직관성, 심미성, 감성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냉철하게 자아를 투시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합리성과 영성이 조화된 성경적 신앙으로 하나님과의 깊이있는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⑧ UBF 자매들의 헌신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을 통해서 자매님들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다. 구약에서는 리브가, 룻, 에스더, 드보라와 같은 여성들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자주장수 루디아, 수산나와 같은 여성들이 남성 못지 않은 믿음과 용기, 진취성, 여성특유의 섬세함, 진심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자매들을 예언자로, 선지자로, 전도자로 귀하게 쓰신 것이다. 

UBF역사에 있어서도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자매들의 헌신을 빼 놓을 수 없다. 배사라 선교사는 젊음과 인생을 송두리채 드려 결혼의 꿈을 부인하고 복음 역사에 헌신하는 아름다운 본을 보였다. 그 뒤를 따르는 안마리아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자매들 역시 자신의 꿈과 이상에 얽매이지 않고 충성스럽게 복음역사에 동역하였다. 

자매들은 성경적 여성관에 입각하여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역사 환경을 섬기며 많은 수고를 한다. 온 마음을 다해 양들을 돌보고 센타의 궂은 일들을 도맡아 섬기면서도 자기를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한 송의 백합화와 같이 순결하고 내면성있는 자매들의 헌신에는 예수님을 배우는 아름다운 신앙의 향기가 난다. 

사모들은 자녀양육과 가사노동, 직장생활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캠퍼스 양들을 심방하여 돌보는 사명의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감당한다. 직장 일이 끝난 후에는 센타에 들러 1:1을 하고 양들의 문제를 들어주며 돕다가 밤늦게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서는 다시 자녀들을 돌보고 남편을 섬긴다. 자매들의 주님께 대한 절대적 사랑과 헌신은 뜨겁고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러한 자매들의 헌신과 복음역사에 대한 절대성으로 인해 UBF의 생명력이 유지되고 양들이 은혜를 받아 예수님을 배우고자 나오게 되는 것이다.


⑨ 일관된 방향성-학생운동과 선교운동

UBF운동은 역설한 바와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가운데 세계 선교에 눈을 뜨게 되었고 오직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여 세계 선교 역사를 이루었다. UBF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을 믿어 순종시켜 선교사로 양성한다는 일관된 방향성과 목표가 있다. 일반적인 경우 순수복음전도로 시작해 성장한 교회나 선교단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의료 복지나 가정 복지, 기아 퇴치, 사회 정의 실현 등 여러 문제에 관심영역을 확대하는 추세를 감안할 때 UBF의 이러한 일관성은 편협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UBF에서도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지원하고 북한동포돕기를 하기도 한다. 또는 음악회나 미술전시회를 후원하기도 하고 출판사업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일들은 어디까지나 간접적 활동이며 결코 핵심사항은 아니다. UBF는 학생복음운동과 세계선교라는 중심을 잃지 않고자 다른 부수적인 것들은 가능한 축소하며 학원선교라는 핵심적인 사명에 집중하고자 한다. 

UBF운동의 독특성은 바로 이 일관성에 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 한 가지를 충성스럽게 감당하고자 하는 분명한 자세가 없이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학생의 신분일 때 뿐 아니라 직장인이 된 후에도 캠퍼스를 심방하여 학생을 전도하고 노인이 되어도 학생 양들을 제자양성할 뿐 아니라 할 수만 있으며 자녀도 학생복음운동을 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일관성은 편협성이라는 측면에서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모임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핵심을 잃지 않고 집중하여 사역할 수 있는 장점이 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 역사에 유익이 된다. 


⑩ 한국교회의 성장에 기여

홀리클럽이 철저한 성경공부를 통해 영적 군사들을 양성했던 것처럼 UBF도 복음신앙이 분명한 평신도들과 영적 지도자들을 배출하는데 기여했다. UBF에서 훈련받은 후 이탈하는 이들은 타종교나 이단종교에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반드시 복음적인 기독교 공동체에 가서 봉사하고 있다. 이는 UBF에서 성경에 기초한 절대복음신앙을 배우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함양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UBF는 넓은 의미의 선교를 한 것이며 한국 교회의 성장에 기여한 것이다. 

또한 UBF가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력으로 교계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배출한 것을 들 수 있다. UBF 출신 가운데 교계에 진출하여 탁월한 리더쉽과 좋은 영향력으로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호남신학대학교의 총장 황승룡 박사, 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임열수 박사, 광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고광필 박사 등 많은 이들이 UBF의 성경공부와 이사무엘 선교사의 비젼에 은혜를 받고 목회자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다. 

또한 성경말씀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와 기독교 양서보급을 통해 기독교 문화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했다. 『일용할 양식』 및 양서(『평신도를 부른다』, 『근대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기독교 강요 산책』, 『자아의 탐색』, 『고전과 인물로 본 기독교 사상』, 『목회자의 사모』 등) 보급에 힘씀으로 세계 선교와 기독교 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것이다. 


⑪ 대 사회참여

전술한 바와 같이 UBF의 독특성으로 인해 사회참여가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사회참여에 힘쓰고 있는 점도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선교단체와 연합한 「기독청년대학생 통일봉사단」활동을 통해 북한동포를 위한 20억원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이진호, 국민일보 기사, 1997년 5월 8일.

 또한 해마다 홍수나 태풍 등의 피해를 입은 국내 동역자들의 가정을 돕고 있다. (1999년에는 1500만원 정도 지원) 이 외에도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⑫ 기독교 공동체에 협조 및 참여

개척기의 한계로 인해 초창기에는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협조 및 참여가 미흡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UBF 모임이 안정된 후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기독교 공동체로서 연대하고자하는 노력을 해 오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가입하였고 전요한 목자는 한기총 산하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며 물질적으로 운영을 보조하고 있다. 또한 학원복음화협의회에 가입하여 대학생 선교를 위한 연합운동에 협조하며 CCC, 조이선교회, 예수전도단 등 12개 대학생 선교단체들과 연합하여 「기독교 통일봉사단」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미래의 한국교계의 지도자가 될 신학대학 및 대학원학생들에게 초교파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UBF의 장학금을 지원받는 대학교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총신대, 장신대, 합동신대, 서울신대, 호남신대, 광신대 등이다. 


(2) 보완될 사항


① 역동적 예배관의 창출 

예배란 죄인과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된 감동의 순간이다. 또한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연합하고 교통하는 혼인잔치와 비교될 수 있다. 그럼에도 종종 이런 예배의 핵심을 놓치고 마치 예배가 귀납법적 성경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인식되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에 예배는 반복되어진 성경공부가 되어버리고 듣는 이들은 지루하고 딱딱한 심령으로 말씀을 대하기 쉽상이다. 예배의 본질을 놓쳐 버리게 될 때 결국은 영성을 상실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적인 이해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 예배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감격과 감동이 있어야 한다.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 분과 교통하는 예배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청중들의 예배관의 변화도 필요할 뿐 아니라 메신저의 피나는 노력도 요구된다. 메신저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서며 너무나도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권세있게 선포하도록 온 심령을 다해 투쟁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사무엘 선교사는 UBF men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사랑하고 붙드는 것이 중요함을 그의 편지에서 역설하고 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전심전력하여 영생에 이르는 생수를 양들에게 마시게 할 때 복음 역사는 어디서나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선교사들에게 편지할 때마다 먼저 본토의 언어를 완벽하게 정복할 것과 말씀의 도사가 될 것을 늘 권면합니다.

 이사무엘, 편지글, 2001년 4월, 10.



② 성령에의 보다 적극적인 의존

UBF 목자들은 양들에 대한 심정이 누구보다 뜨겁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양들도 끈질기게 돕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사람의 힘으로 밀어붙이기에 스스로 한계상황에 빠져 영적으로 침체되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 양들의 상황변화에 따라 목자가 up and down하기도 하며 양들로 인해 마음에 평안을 잃기도 쉽다. 

UBF는 성령에 의존하고 성령의 민감한 방향에 겸손히 순종하고자 애쓰는 좋은 신앙전통이 있다. 그러나 사역을 섬기는데 있어 좀더 성령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의존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해 섬기되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좀더 간절하고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할 때 양들의 상황변화에 상관없이 목자의 심령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깊이 있는 영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인 허드슨 테일러 역시 이러한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자유함과 평안을 얻는 체험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거듭난 후 복음을 듣지 못해 죽어가는 중국 영혼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으로 인해 건강을 잃을 정도로 상심하였다. 상한 심령으로 해변가를 거닐던 그는 중국 선교에 대한 근심조차도 주님께 내려놓아야 한다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주님은 그 곳에 나를 찾아오사 나의 불신을 압도하셨다. 나는 중국 선교를 위해 내 한 몸 온전히 드리겠노라고 주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나는 주님께 모든 문제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님께 내려놓겠다고 말씀드렸다. 나의 몫은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것뿐이었다. 나와 나의 동역자들을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다. 수고로이 짐 지고 곤한 심령 속으로 평화가 밀려왔다. 

 Hudson Taylo, Hudson Taylor(Minneapolis: Bethany House, 1995), 145-46. Originally this book was 

published under the title, To China with Love. 



③ UBF의 역사성과 정체성의 확립

UBF운동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정치적 혼란, 가난, 운명주의로 주저앉아 있던 지성인들에게 성경말씀을 통해 희망을 불어넣고 세계선교라는 원대한 비젼을 보여 주었다. 암울한 한국의 현실과 미래 가운데 헤매던 지성인들은 이사무엘 선교사의 원대한 비젼에 열광하였고 청춘을 바쳐 호응하였다. 

1980년대는 민주화라는 열망 가운데 대학가에 최류탄과 화염병 등 폭력과 분노, 절망이 난무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시대 가운데 UBF운동이 제시하는 복음을 통한 구원과 사회개혁은 학생들의 심령에 크게 역사하였고 UBF운동은 뜨거운 열기로 성장하였다. 학생목자들은 생명구원역사를 인생의 절대절명의 과제로 영접하고 어떠한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시대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UBF운동도 정체성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계여행의 자유화로 인해 학생들은 배낭여행, 어학연수 등을 통해 세계를 쉽게 드나들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교류는 이러한 세계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다른 교회나 선교단체에서도 UBF식의 인격적인 제자훈련을 시도하며 단기선교사 파송 등을 통해 세계선교를 추구하게 되었다. 세계를 향한 비젼과 제자도는 더 이상 가슴을 끓게 하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게 된 것이다.

또한 국내적으로 문민정부 출범을 통해 민주화의 염원이 이루어졌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가치관이 사회를 강타했고 절대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의가 제기되었다. 타인을 위한 희생적 삶이나 대의명분이 비웃음을 사는 실리주의적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대학가에는 상대성의 기치 아래 다양한 사상들과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퍼져갔고 이와 함께 개인주의와 쾌락주의, 물질주의의 누룩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학생들의 관심은 급속도로 상대주의화, 개인주의화되었고 이 가운데 학생운동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UBF 역시 정체성의 위기를 맞으며 내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기 시작했다. 방황하는 지성인들에게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만이 문제의 해답임을 설득력있게 주장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던 역할이 모호해짐으로 정체성의 위기가 온 것이다. 

겉으로 볼 때 UBF는 1990년대에도 상당한 외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 이면을 볼 때 초기의 열정과 절대성, 생명력이 둔화되었다. 단적으로 한국 UBF목자들 가운데 세계선교와 학원선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UBF 운동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④ 원활한 의사소통

초대교회 당시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교회의 머리로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보면 예수님의 직계 제자도 아닌 사도 바울이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책망한 기록이 있다(갈2:11-14). 이는 초대교회가 복음의 진리 안에서 위계질서가 분명하되 누구나 의견을 제시하고 수용할 분위기가 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UBF도 시니어 목자들과 주니어 목자, 여러 후배 목자들 간에 원활한 의사소통 체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지도부와 하위 체계 간에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그것이 수용되는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이런 의사소통은 위계질서를 지키면서 충분한 의견교환을 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일방적인 폐쇄통로를 통해 의사소통이 될 때 생기지 않아도 되는 문제와 오해가 야기된다. 예를 들면 이사무엘 선교사와 개인적 연분이 있는 어느 목자가 그 위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통으로 연락해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이런 경우 중간선들은 당황하게 되고 소외감을 느낄 수도 있고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UBF의 구조가 독재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방지하려면 UBF 내에 위계질서를 지키면서 자체 내에서 충분한 의견교환이 이루어진 후에 지도부로 보고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원칙과 체계가 필요하다. 


⑤ 보다 냉철한 자기점검과 자아성찰의 필요

 어떤 이는 UBF에 대해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 [UBF도] feed back이 없는 가운데 자가진단의 결여로 인해서 온도가 변화되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여 따스한 상태를 즐기려고 하다가 뜨거운 물에 익혀 죽은 개구리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종교개혁사 서평,” 미출판된 논문, 5.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UBF 역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우리 모임의 좋은 위대한 점에 대해서는 수없이 교육받았다. 물론 우리 모임의 위대한 점을 알고 있고 긍지를 갖고 있다. 다만 우리의 모임 40년 동안 우리 모임의 약점에 대해서 루이스처럼 담담하게 기록한 부분들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선교사님들의 선교보고 속에서도 시행착오와 아픔들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승리한 것을 중심으로 보고된다. 그러면 후배들은 그 속에서 교훈을 배울 수 없다. … [우리 역사를] 담담하게 평가하고 기록으로 남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 “종교개혁사 과제물,” 미출판 자료, 5.


UBF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단체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적 요소가 많기에 UBF men들의 자부심 또한 강하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이에 따른 모임의 내외적 변화 앞에서 보다 냉철한 자기점검과 자아성찰이 요구된다. 이제 UBF는 여유를 갖고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경직된 사상이나 모임은 변화하는 시대 가운데 쓰임받기가 어렵고 도태의 길을 면키 어렵다. UBF가 경직되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혹시라도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 돌아보고 살펴보고 점검하면서 자기를 더욱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필요한 때이다. 

  

⑥ 사모의 교육

전술한 바와 같이 UBF의 자매들의 헌신은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하다. 젊음을 드리고 인생과 가정을 드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귀한 사모들의 수고는 오늘날의 UBF의 귀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많은 헌신에 비해 재충전의 기회가 적음으로 인해 사모들은 원치않게 ‘소진’의 위기에 봉착할 때가 있다. 특히 Staff 사모의 경우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사모들에게 지속적인 교육을 통한 영적, 지적, 육적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함으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모들이 지속적으로 재충전될 때 UBF의 미래도 밝을 것이다. 


⑦ 자녀교육

목자들은 캠퍼스 양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하지만 그 가운데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맡겨지면서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부적응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캠퍼스 양들뿐 아니라 자녀들도 양으로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자녀들도 양처럼 섬기며 2세 목자요 선교사로 양육할 때 하나님의 역사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⑧ 학사문제

UBF는 학생복음운동을 지향하므로 학사가 되고 노인이 되어도 캠퍼스 양들을 섬긴다. 학사들은 학생 때와는 달리 물질문제, 가정문제, 직장문제, 자녀양육문제, 질병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한다. 이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부족할 때 학사들은 캠퍼스 미션 중심의 센타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존재의미를 상실하기도 한다. 

UBF는 분명한 학생복음 운동을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지만 이러한 학사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 문제로 인해 학생 양을 섬기기 어려운 학사라고 할지라도 센타에서 존재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를 들면 학사들이 헌금, 기도, 섬김 등의 다양한 사역을 통해 센타 역사에 주인의식을 갖고 나름대로 성장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⑨ 엘리트주의(Elite mentality)

UBF의 강력한 ‘제자도’는 큰 장점이면서 동시에 독선적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무리가 아닌 제자라는 점에서 특권과 자부심을 느끼며 열정을 다해 복음역사를 섬겼다. 그러나 이런 제자도가 엘리트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자칫하면 외부에 대해 울타리를 높이 치게 되고 자모임 최고주의에 빠져 우물안 개구리처럼 되기 쉽다. 세상과 구별된 제자도를 심되 그것이 독선과 아집으로 빠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⑩ 이탈자에 대한 정죄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일부 UBF 지부의 경우 이탈자에 대해 강한 정죄의식을 심는 경향이 있다. 어느 모임이나 이탈자는 있기 마련인데 유독 UBF를 떠난 것에 대해서 죄인취급을 하는 것은 건전하지 않다. 정죄하기보다는 이탈할 수 밖에 없는 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용납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기도해 주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것이다. 


⑪ 교회론 정립

UBF지체들은 본인들이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의 장소를 “센터”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도해 주는 평신도 지도자나 목회자를 “목자”라 호칭한다. 이들은 보편적으로 알려진 “교회”나 “목사”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 않다. 따라서 UBF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들 가운데 UBF를 선교단체나 아니면 IVF 또는 CCC와 같이 “준교회”(para-church)로 인식하는 자들도 있다. UBF가 “준교회”라면 주일 날 예배는 지역교회(local church)에 가서 드려야 되는데 UBF men들은 교회에 안 가고 자체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비난도 있다. 이제 UBF는 교회인지 “준교회”인지 보다 분명한 자아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배경은 구약에서 “카할”(총회나 집회소집, 신9:10) 또는 “에다”(회막 앞에 모여있는 백성, 출12:3)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카할”은 신약에서 “에클레시아”(교회)로, “에다”는 “수나고게”(회당)로 대개 번역되어 있다. “에클레시아”는 어떤 건물이나 장소의 개념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 삼위의 하나님을 예배드리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선교명령에 순종한다(마16:18).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 “에클레시야”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며, 만물이 그 발 아래 있어 대대로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노래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영적으로 단일하고,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표지로 하나님의 말씀선포와 합당한 성례전(세례와 성찬)을 들고 있고, 이에 권징을 추가시키기도 한다. 

확실히 UBF는 성경적으로 “에클레시아”이며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교회의 표지들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이제 더 이상 UBF가 “준교회”라는 애매모호한 범주에 들어가 혼란된 교회관을 가질 필요가 없다. UBF는 학원선교를 위한 시대적 사명을 가진 특수한 “교회”이다. 

그러나 UBF는 장로정치 중심의 장로교회나 감독정치 중심의 감리교 또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천주교 등과 같은 의미의 교회는 아니다. 일반 교단과 달리, UBF는 평신도 선교사 양성과 학원선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차별성이 있다. 이 특수성은 일반 교단에 대한 우월감이나 교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 위에서 일하되 각각 그 단체마다 지니는 성격에는 차이점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의 특수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구세군이 그리스도의 군대라는 독특한 교회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독선적이라고 평가받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세군만의 특성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UBF도 학원선교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띠는 특수교회이다. 



⑫ 연구기관

UBF는 실천적인 성경공부와 단순한 순종 등을 강조하는 운동이었으므로 전문연구기관이 거의 부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증가하는 스탭들과 선교사들의 보다 나은 양질의 교육을 위해서는 전문연구기관의 지원이 필요해졌다. 또한 UBF 운동에 관한 지속적 연구와 보완의 측면에서도 연구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가운데 2001년 3월부터 UBF 선교 연구원이 설립되어 스탭 및 선교사 교육을 위한 체계를 잡아가고 있다. UBF 선교 연구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를 통해 21세기의 UBF가 하나님께 더욱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결  론


지금까지 역사 속에 나타난 기독학생운동과 UBF운동을 고찰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영적 훈련에 관심이 있고 영성 개발에 적극적인 소수 정예 중심의 영적 지도자 양성 역사였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선택하여 함께 거하며 영적 지도자들로 키우셨다. 기독학생운동 역시 소수의 청년들이 영적 성장을 위해 시작한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어 각 사람을 영적 지도자로 훈련시켰다. UBF 운동도 일반 대중 목회가 아니라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감당할 제자양성 역사였다. 

둘째, 성경에 기초한 엄격한 영성훈련이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영성훈련은 성경에 기초해서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살아있는 기도, 성령충만한 전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구제, 성도간의 인격적인 교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 등이었다. 이러한 영성훈련은 때로는 율법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기독학생운동이 각 시대에 있어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셋째, 소수정예 중심의 영성훈련이 시대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 도덕적 각성운동으로 일어났다. 영적으로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마다 소수 중심의 훈련된 영적 지도자를 통해 기독학생운동이 일어났고 사회를 뒤바꾸는 영적 각성운동으로 성장하였다. UBF운동도 소망없이 누워있던 혼란기의 한국 대학생들을 일으켜 세워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감당하는 사명인들로 키워내는 영적 도덕적 각성 운동이었다. 

넷째, 뚜렷한 ‘이상’을 세우고 그것을 위해 ‘순교’정신으로 헌신했다. 청춘과 인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뚜렷한 ‘이상’이 있을 때 청년들은 비젼을 불태우며 헌신할 수 있다. 사무엘 밀즈의 건초도미 기도회나 SVM선교운동은 비젼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세계를 향해 나아가 승리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UBF운동도 “성서한국 세계선교”라는 원대한 비젼으로 청년들의 심령을 뜨겁게 했기에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UBF운동은 다른 기독학생운동과는 다른 독특한 차이점이 있다. 홀리클럽은 모임이 성장하자 소수정예중심의 특수성을 잃고 일반 교회화되었다. 이를 통해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력은 커졌지만 결과적으로 기독학생운동으로서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SVM은 선교운동이 성장했을 때 지도부 안에는 여러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이 유입되게 되었다. 이들은 세계 선교에 관심이 없었고 복음보다는 경제 개발, 국제평화, 사회정의와 인종 차별 같은 문제들을 위해서 학생들이 일어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절대 복음신앙을 상실했을 때 그 모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역동적인 생명구원역사에 쓰임받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측면에서 UBF운동은 다른 기독학생운동과 달리 학생복음운동의 대전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학생운동에 집중하고자 하기에 여러 어려움에도 부딪히고 비난도 받지만 UBF운동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포커스를 잃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앞으로 100년, 200년이 지난 후에는 역사가 우리의 사역을 평가할 것이며 기독교 역사에 있어 독특한 학생복음운동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시점에서 UBF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언하는 것으로 본 연구를 마치고자 한다. 


첫째, 응집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초창기 UBF운동의 특징은 뜨거운 열정과 단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응집력이었다. 운동이 생명력이 있으려면 응집력이 있어야만 한다. 모일 때 모이고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응집력은 운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회원들 각자의 심령에 이런 동기부여를 통한 열정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다. 

동기부여는 “왜 내가 UBF 복음사역에 청춘과 물질과 인생을 투자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정체성 확립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UBF에서 인생을 드려 복음역사를 섬겼는데 전도의 열매도 별로 없고 물질문제, 직장문제, 가정문제 등의 인생문제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에도 이 운동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원론적으로 들리겠지만 성경으로 돌아가야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에 기초해서 캠퍼스 사역에 대한 하나님과의 개인적 약속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개개인의 가치관이 성경적 가치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를 헛된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 가운데 그리스도를 배우는 고난을 소중히 여기는 영적 가치관이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UBF 복음운동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UBF 운동은 성경과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함께 얻은 경우를 승리라고 여기며 동경하기보다 회원들 개개인이 성경적 가치관을 갖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하겠다. “천국의 순례자”의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UBF 운동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조직의 구조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후배들이 이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며 풀어나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개척기 조상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시대적 상황의 변화나 이에 따른 정체성 위기와 같은 문제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금 더 깊이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이제는 개척 조상들만이 일할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개척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2대, 3대들이 계속 성장해야 한다. 개척 조상들은 후배들의 연약함만 보지 말고 이들 안에 잠재한 무한한 창의성과 추진력을 보아야 한다. 현 상황에서 그들이 스스로 역사성과 정체성을 회복하고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을 동역자로 세워 일하게 하고 그들에게 역사를 계승하는 특권과 의무를 과감히 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권리와 의무가 뚜렷이 규명되는 직책의 적절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하고 조직의 구조가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내면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내면화란 여성화나 약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역의 성격에 있어 야만이 아닌 철저함이 있되 부드러움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면화란 내적으로는 분명하고 강하되 외적으로는 부드러운 자세를 가지고 인내하며 섬기는 성숙한 자세를 의미한다. “뿔개미 정신”으로 끈질기게 밀어붙이되 좀 더 인격적이고 부드럽게 사역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 사랑과 신뢰가 회복되어야 한다. UBF 운동은 선후배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에 기초한 절대순종과 헌신의 역사였기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이 약화됨으로 비난과 방어, 불신과 회의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게 되었다. 다시금 모임 안에 사랑과 신뢰에 기초한 깊이있는 관계성이 회복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넷째, 비젼을 회복해야 한다. 초창기 UBF 운동이 놀랍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품고 섬기라는 원대한 비젼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신세대들은 개인주의, 이기주의에 길들여진 삶의 패턴으로 인해 소시민적인 안일한 삶만을 소망으로 여긴다. UBF 운동은 이런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열려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미래에 대한 믿음과 꿈을 심을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경의 요셉처럼 하나님 안에서 크고 원대한 꿈을 꾸도록 격려하며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섯째, 모험심을 심어야 한다. 온실 안의 화초처럼 자라난 신세대들은 인생을 너무나 쉽고 편하게 살려는 경향이 강하기에 작은 어려움에도 절망하고 포기해 버린다. 이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도록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도전이 된다. 그러나 인생이란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인생의 묘미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UBF운동은 신세대들에게 모험심을 심는 가운데 자아를 부수고 성장하는데서 오는 재미, 인생의 깊은 묘미를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여섯째, 의식의 혁명을 통해 사상성을 구축해야 한다. 사실 그동안 UBF운동이 해 온 일이 바로 이것이지만 지금까지는 단순하게 순종하고 성경공부하는 가운데 이런 것들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체성의 위기가 도래하고 신세대들을 제자양성하는 데서 부딪히는 한계상황에서 UBF 운동은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실생활에 적용하는 살아있는 성경공부가 계속되어야 하지만 이것이 산발적인 성경공부로 끝날 것이 아니라 깊이있는 영적 훈련이 되도록 힘써야할 것이다. 또한 회원들에게 사상적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 UBF 운동의 정체성과 사상성을 확립하도록 도와야하겠다. 


결론적으로 볼 때, 현 상황은 UBF 운동이 극복해야 할 위기의 상황인 동시에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도약의 기회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런 변화와 위기의 순간은 항상 있었다. 예를 들면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 교회는 엄청난 변화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교회는 양적으로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부흥하게 되었지만 질적으로 초대교회의 순수신앙을 잃었고 기독교를 출세와 영달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에 의해 타락하게 되었다. 이 때 순수하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성경대로 살고자 애쓴 청년들에 의해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고 이 수도원운동을 통해 영적으로 암흑과 같았던 중세 시대에 기독교적 영성과 복음정신이 계승될 수 있었다. 

또한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는 어떠한가. 농업과 상업 중심의 사회구조가 무너지고 공업 중심의 사회로 급격히 변화했으며 성경의 절대성에 회의를 던지는 계몽주의와 과학 만능주의 등이 풍미하던 그 시대는 오늘날의 인터넷을 통한 정보사회로의 변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에 비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시대적 변화 가운데서도 영국의 홀리클럽, 캠브리지 7, 미국의 SVM 선교 운동 등의 역동적인 복음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통한 영적 각성운동의 물결이 크게 일어났다. 

역사적 고찰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어느 시대나 변화에 따른 위기와 도전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며 성경으로 돌아가 복음정신을 회복하고 영성훈련을 회복할 때 위기는 기회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UBF운동은 더욱 복음적인 영성훈련과 절대적인 복음정신을 회복하여 포스트모더니즘과 정보화 시대에도 영향력을 미치는 생명력있는 영혼구원역사, 세계선교역사를 이루어야하겠다. 

또한 초대 교회와 같은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을 지향해야 하겠다. 전술한 바와 같이 UBF의 공동체적 신앙전통은 세상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를 거슬려 복음신앙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울러 초신자들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훈련된 제자들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학사 가정들은 센타 중심으로 모여 살며 교제를 나누고 센타역사를 적극 섬긴다. 이 가운데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같이 함께 나누고 동역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기를 힘써야겠다. 학생들은 장막공동체 생활을 통해 함께 예수님을 배우는 영적인 생활에 힘쓸 수 있다. 또한 축구, 농구, 족구 등 운동도 함께 하며 영어공부도 함께 하고 취업준비도 함께 하는 등 생활공동체로서 교제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공동생활하시며 생활 속에서 제자양성을 하셨고 수도원운동 역시 모든 것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누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정신을 계승했다. UBF도 영적 가족 공동체로 모이기에 힘쓰며 세상과 구별된 경건한 삶, 뜨거운 사랑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학생복음운동의 좁은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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