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목회 현장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예언자 김회권 교수를 만나다

이창무 2015. 5. 18.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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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는 예언자 김회권 교수를 만나다


[254호 그 사람의 서재 마지막 회 ]

http://m.goscon.co.kr/articleView.html?idxno=28046&menu=2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를 꿈꿔야만 하는 자기 모순적 존재, 예언자. 이십대의 날 것 그대로의 영성과 시대를 지나면서 얻은 칼처럼 예리한 지성의 소유자 김회권 교수는 삶으로 정제된 메시지, 그 메시지를 다시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운명적 존재를 요구하는 우리 시대에 가장 적실한 예언자다. <청년 설교 1, 2>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등을 쓴 작가로서, 이사야 전공자로서 오늘도 예언자적 삶에 투신하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있는 그를 만나기 위해 ‘그 사람의 서재’팀이 숭실대 한경직 기념관 교목실을 찾았다.


김 교수의 신앙 이력


정지영 편집위원/ 안식년 다녀오신 후 하셔야 할 일들로 많이 바쁘시지요?

김회권 교수/ 기독교학과 교수 일 외에 교목실장으로 학교와 학생들을 섬기며 바쁘게 보내고 있습니다.


정 위원/ 그동안 만난 분들의 신앙 이력이 이 코너를 통해 소개된 경우가 많습니다. 교수님도 ESF 간사 시절과 유학 이후 이야기는 종종 듣지만 가족사나, 간사 이전 시절의 신앙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김 교수/ 저희 집은 철저히 유교적인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교육을 받으신 종손이셨고요. 그 종손의 촉망받는 아들이었던 제가 대학교 선교단체의 성경공부 모임에 입문하면서 예기치 않게 신앙을 갖게 되어 파란을 겪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포함한 아들들에게 적어도 가문을 일으키고 증조할아버지가 떨쳤던 학자적 명성을 이어가기를 기대하셨는데 그런 제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간증을 하니 “네가 공부하다가 힘들어서 심리적으로 귀의했다면 이해하겠으나 그게 아니라면 심각하게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제가 좀 심각한 것 같으니 “목사만 되지 말라”고 당부하셨죠. 그 당시 아버지가 시골에서 본 목사상은 생산하지 않고 농민의 쌀을 거저 얻어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였거든요.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여신도들과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깨끗한 손을 하고 다니는 사람,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사람이었던 거죠. 제가 그런 목사가 될까봐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그게 1980년 여름과 가을 이야기예요. 그 사이 제 신앙도 자라고 아버지에게 신앙을 다소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작은 사건이 일어났어요. 신앙 빼고는 모든 면에서 매우 건실하게 생활하는 제 모습과 제가 장학금을 받게 된 일이라든가, 제가 전도한 세살 위 형이 예수를 믿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집안에 부담이 되었던 학비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서 신앙에 대한 약간의 긍정을 하셨던 거죠.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이 자식들에게 나쁜 짓을 하는 분이 아니구나”라는 정도는 깨달으셨어요.


 

정 위원/ 신앙에 호의적인 마음이 생기셨더라도 목사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을 것 같습니다.

김 교수/ 네, 한사코 목사되는 걸 싫어하셨죠. 그래도 나중에는 “너희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겠다. 이제부터는 점치러 가지도 않고, 명절에 절하는 게 네 신앙에 저촉되면 제사는 지내지 말고 네 방식대로 사랑방에서 기도하라”고까지 양보를 하셨어요. 1983년에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병환 중에도 병이 나아 기동할 힘이 생기면 꼭 교회에 다니겠다고 자주 말씀하셨지요. 그 뒤로도 항상 하나님을 믿는다 하셨고, 제 신앙이 매우 진지한 걸 아시고 하나님께 거의 돌아오신 상태였지만 신앙의 결실이나 세례를 받지는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도 지금은 신앙을 갖고, 어머니 수준에서는 기도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정 위원/ 교수님이 대학시절 신앙에 입문할 때 다닌 대학생 선교단체가 ESF였지요? 그곳에서 소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는데, 어떻게 ESF에서 활동하게 되셨나요.

김 교수/ 1979년 5월 22일, 독문과 선배들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그 선배들이 소속된 단체가 이승장 목사님(그때는 38세의 목자셨죠)이 미림여고 앞의 7~8평짜리 건물에 세를 얻어 서울대 법대, 인문대 학생들과 성경공부를 하던 SBF(Students Bible Fellowship)라는 모임이었습니다(1984년에 ESF로 개명). 그 모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점진적으로 기독교 진리에 설복당한 것이지요. 그해 11월 추수감사절 성경사경회에서 제가 거듭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때 설교하신 분들이 김만성, 박득훈, 김대식 세 분의 목자님입니다. ESF 성경사경회의 특징이 철저한 성경 강해인데, 저는 5월부터 11월까지 약 6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한 후에 사경회에 참석했지요. 첫날은 김만성 목자님이, 이튿날은 박득훈 목자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그 기간에 요한일서 2장 15~17절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상당히 극적이었어요. 많이 울었지요. 7,80명이 저를 에워싸고 ‘김회권 형제가 거듭났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더군요. 제가 꼬치꼬치 따지고 하나님을 믿기 힘든 이유를 성경공부 시간마다 물었기 때문에, 제가 신앙을 고백하니 저를 완악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축제가 벌어진 것이지요. 그 당시 SBF의 목자님들이 워낙 헌신적이고 순수했습니다. 그런 기독 청년 동아리에서 기독교 진리가 삶 속에 체행, 구현되는 걸 보면서 신앙을 갖게 된 것이죠. 참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정 위원/ 교수님이 평소에 청년 때의 회심을 강조하시는 분이라서 그런지 교수님의 회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김 교수/ 당시 서울대 기숙사에 살았는데, 신촌 이화여대 앞 대현동에서 서울대 기숙사까지 굉장히 멀었습니다. 그 거리를 142번 버스를 타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성경공부를 하려고 갔어요. 박정희가 죽고 한 달된 시점이었는데 9월 13일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지고 수업이 휴강되고, 학우들은 삐라는 뿌리는 등 매우 어지러운 때였어요. 그런 와중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많은 의심과 질문을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119가지 이유를 적어서 선배들에게 갖다 주면, 선배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논쟁을 피하더라고요. 그 많은 질문들에 이화여대 누나들, 서울대 형들이 지적으로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일부러 무능력하게 굴었습니다. 대답을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죠. 제가 거듭나던 그날, 뒤편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는데 요한일서 2장 15~17절 말씀이 박득훈 목자님의 설교 속에 유난히 크게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 말씀으로 확고부동하게 전향했습니다. 불멸의 가치인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삶이 중요하구나. 육신과 안목의 정욕, 이생이 자랑 즉, 내 삶의 원동력이었던 두 개의 정욕과 하나의 자랑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덧없는 것과 영원한 것 사이에서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알게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아들인 그 분이 내 주가 되어야 하고, 그분을 따르다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깨닫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저에게 그 깨달음은 엄청난 계시였어요. 큰 은혜가 임해서 그동안 의심하던 모든 성경 구절이 깨달아졌어요. 그날이 1979년 11월 17일입니다. 지금도 그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것이 저에게 다메섹 도상의 낙마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1979년 5월 22일부터 11월 17일까지의 제 인생에 비춰 온 은총의 햇볕이 참으로 강렬했어요.



정 위원/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119가지는 어떤 내용이었나요.

김 교수/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경박해 보였어요. 인생이 이렇게 복잡한데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기뻐할 수 있나, 그게 싫었던 거지요. 저는 성실의 법칙을 믿고 자아가 강하며 심지가 굳은 사람이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팔딱팔딱 뛰는 그리스도인들의 그 안도감, 행복감이 가소로워 보였어요.


정 위원/ 예수가 답이라고 말하지만 피상적이고 막연한 현대의 신앙에 회의하셨던 거군요.

김 교수/ 예 그렇습니다. 제가 진주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 집 앞 교회를 이따금씩 다녔습니다. 진주에는 고신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가끔 교회에 나가 설교를 들어보면 정말 지루해요. 틀린 말은 아닌데, 5분이면 될 것을 40분 동안 설교를 하니, 목사는 물론이요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참 아둔한 사람들이구나 생각했죠. 그럼에도 제게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1974년에 열린 ‘엑스플로 74’에 100만 명이 모이는 게 너무나 신기한 거예요. 구원받았다는 기독교인들의 기쁨이 무기력해 보이고, 끼리끼리 모이는 게 싫었는데, 100만 명이 모이는 걸 보니, 저건 내가 해명해 봐야겠구나 싶었죠. 성경을 직접 읽고 판단해야겠다 싶었지만, 당시엔 세로 성경이 잘 읽히지 않더라고요.


정 위원/ 대학생 때의 신앙 경험이 지금의 교수님을 기본적으로 형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7,80년대의 활발했던 선교단체운동이 지금은 ‘제2의 김회권’을 만들어내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김 교수/ 지금 제가 쓰는 언어와 글들은 모두 대학생 시절과 간사 시절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그때 배운 것들을 포장하고, 정교화하고, 선교단체에서의 공부와 수련의 결과 얻어진 사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복음주의운동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우선, 2000년 서구 교회사에 사회적 신앙을 실천한 사례를 발굴해야 합니다. 본회퍼와 해방신학 전통도 공부해야 합니다. 그들의 사회참여를 포함하는 영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지요. 최근에야 도로시 데이의 <고백>이 출간될 정도로 복음주의운동의 사회참여적 영성은 빈약하기만 합니다. 김진홍식, 최일도식 사회참여도 현재는 드뭅니다. 영국 케직 사경회만 하더라도 영국 크리스천 실업가를 만드는 모태가 되었는데, 우리 선교단체는 자기 단체에 순응하는 회원을 주로 만들어내지, 보편적 공민을 가진 시민이나 사회 지도자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둘째, 신학만 공부하는 목회자적 지도력 외에도, 폭넓은 사회적 실천에 종사하는 평신도 리더십이 제자 양성 과정에 광범위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기독법률가회(CLF), 좋은교사운동, 한국누가회(CMF) 등 전문직종의 제자도운동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지요. 셋째, 선교단체는 교회와 경합하지 말고, 동맹을 맺어 공생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선교단체 간사는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또 교수급의 식견을 갖추기 위해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받아야 합니다.


정 위원/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공하셨습니다. 전공에 특별한 관심과 계획이 있으셨던가요.

김 교수/ 영문학을 전공으로, 철학을 부전공으로 학부를 마쳤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을 많이 갖는 직업이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설은 근대 문명의 산물이지요. 문맹률이 극복될 때, 책을 읽을 수 있는 중산층이 양성될 때 소설이 많이 읽히거든요. 이청준이 ‘문학과 해방’이라는 글에서 ‘문학을 하려는 사람에게는 지배 욕구가 있다’고 했어요. 선한 것을 가지고 지배하려는 마음이 제 안에 있었던 듯해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야심이 있었던 거지요. 헤밍웨이처럼 세계를 주유하는 작가로 살면서 글을 쓰는 게 꿈이었어요.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사람의 영혼 밑바닥을 다루는 글을 쓰고 싶었던 거죠.


제가 문학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저의 형, 김회관 장로님의 영향이 컸어요. <현대 문학>이라는 잡지가 1970년대에는 중요한 문학 잡지였는데 그 잡지에 단편소설과 시가 많이 실려 있었습니다. 또 유년 시절에는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소설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내가 책에 감동받는 인간이란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식별하는 데 관심을 조금씩 보인 것이지요.


정 위원/ 한국교회의 지성운동을 논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교회가 대학촌교회입니다. 교수님도 그 교회 출신이지요? 그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에서 인상적인 것이 있으셨는지요.

김 교수/ 제가 다닐 때는 대학촌교회 목회자가 백승진 목사님이셨습니다. 꼭 이승장 목자 같은 분이셨어요. 젊은이들이 데모하고 시대를 탄식할 때, 공감해 주는 아버지 같은 분이셨죠. 설교도 간결하고 성경적이었어요. 대학촌교회는 영락교회 여전도회 권사님이 세운 교회라는 인연 때문에 대한수도회 출신 영락교회 권사님들이 오셔서 은사집회(방언 집회, 신유 집회)를 매달 25일에 열었습니다. 하지만 집회 마지막에는 늘 백승진 목사님이 은사 집회의 지도자였던 이복영 권사님에게 안수를 하더라고요. 백승진 목사님이 정통 목회자의 설교에 영적 카리스마운동을 접목시켰던 것이지요. 말씀의 질서 안에 머물면서도 은사운동이 가능하다는 걸 그 교회 안에서 경험한 거죠. 1979년부터 1993년까지 즉, 소속을 활빈교회로 옮기기 전까지 대학촌교회에 출석했어요. 저를 전도한 ESF 선배님들을 비롯해, 저를 따라온 후배들 가령 최은상, 이종철 목사가 모두 대학촌교회에 다녔지요. 대학촌교회에서 총신대 서철원, 이상직 박사, 오성종 목사 등 여러 분들의 설교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정 위원/ 11년 6개월간 ESF에서 사역하시고는 훌쩍 유학을 가셨습니다. 사역을 하시면서 신학의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인지요. 또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셨던 목사가 되셨는데요.

김 교수/ 제가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것에는 김만성 목자님의 결정적인 권면, 즉 ‘회권 형제님은 말씀의 종으로 사셔야 합니다. 다른 거 하면 안 됩니다’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ESF 목자가 되었고, 사역을 하면서 말씀의 은사를 주신 걸 확인했기에 공부하러 간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데는 김세윤 박사가 가장 큰 영감을 줬어요. 공부를 많이 하면 저 분같이 되겠구나. 명쾌하게 강의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김진홍 목사는 공부를 하려면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 가라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유학 준비를 따로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즈음, 여름에 두레연구원에서 5박 6일 동안 노동수련회를 진행하다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남양만에서 김진홍 목사님이 지었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다가 지붕에서 아래로 떨어져 팔에 금이 갔어요.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반석 토플>을 열 개 사서 두 달 반을 들으며 공부했어요. 그래서 1993년 11월에 지원, 이듬해 3월에 프린스턴으로부터 스칼라십을 받고, 1994년 9월에 갔으니 순식간에 유학이 성사된 셈이었죠. 활빈교회에서 700불씩 몇 달을 보내줬지만 IMF가 터져 장학금을 못 받게 되었는데, 박사 과정 들어가서 전액 장학금을 받게 되었어요. 김 목사님은 호의를 베풀려고 했지만 사실상 저는 호의는 별로 받지 않고도 6년 반 동안 계속 공부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어쨌든 유학을 떠나기까지에는 김진홍 목사의 기도가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어요. 지금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많이 다르지만, 아직도 그분에게 일말의 순수함은 남아 있을 거라고 믿어요.




김 교수의 독서와 서재


정 위원/ 교수님의 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그것을 어떻게 형성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교수/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공동체, 곧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서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성경 읽기는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럼으로써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세계 속에 매개되도록 순종할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저의 하나님 나라 신학은 칼빈의 하나님 주권 사상, 하나님의 영광 추구의 신학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즐겨 보는 책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입니다. 칼빈의 신학은 구원론적인 신학이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신학입니다. 교회론적 차원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지요. 독일 고백주의교회 전통에 속한 신학자들을 예를 들면 칼 하임, 칼 바르트, 유르겐 몰트만, 헬무트 골비처 등 2차 대전 후 독일 신학자들의 주된 주제도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요한 크리스토퍼 블룸하르트 부자도 그렇고요. 그들은 유럽의 기독교 문명과 다른, 문화보다 외연이 큰 하나님의 통치야말로 2차 대전 이후 교회에 주어진 최대의 신학적 축복이라고 봤습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전위 기관이지,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는 주장을 의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현대 문화와 자본주의 질서와 사회주의와도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신학이며, 지상의 기독교 문명과 궤도를 달리하는 초월적인 나라입니다. 헤겔이 말하는 첨단 시민사회와 같은 문화와 동일시하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초월에서(미래로부터) 오는 나라입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한 인간 분투를 완전케 하는 하나님 주도적인 나라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재발견이야말로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이런 신학 전통 안에서 칼빈과 구띠에레즈가 화해하고, 블룸하르트와 레오나르도 보프가 화해합니다. 우리나라의 민중신학도 이 전통 안에서 서구의 정통신학과 화해합니다. 저는 김세윤의 바울신학과 칼 하임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요아킴 예레미야스의 신약신학이 이 하나님 나라 신학 안에서 통합된다고 봅니다. 심지어 존 스토트나 로이드 존스의 신학도 이런 전통 안에서 화해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정 위원/ 하지만 로이드 존스같은 오래된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급진적 도래, 인간의 결단의 긴급성이 너무나 분명한 나머지 회개와 결단의 긴급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구원만을 말해 성경의 메시지를 축소시켰지요.

김 교수/ 맞습니다. 구원론적 기독교의 논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기독교가 남녀호랭교나 천리교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론적 기독교는 결국 종교 다원주의 논쟁에 휘말립니다. 저는 종교 다원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으로 구원받는 건 믿지만 제도교회가 구원을 주는 건 믿지 않습니다. 현실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준다고도 믿지 않기에 더더욱 불교나 이슬람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면 기독교는 불교와 이슬람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 사랑을 위해서 종처럼 되는 게 하나님 나라인데, 그게 어떻게 제도권 종교들 중 하나와 같겠습니까! 이렇게 배타적 기독교만이 세계에 쓰임새가 있는 거죠. 문제는 이 배타성 안에 엄청난 포용성이 있는 거죠. 모든 사소한 차이를 녹여버립니다. 배타적 주장을 뒷받침하는 압도적 헌신과 진리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역설적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배타성을 절대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배타성 안에는 포용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강조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그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흘릴 정도로 복종한다면 그의 주장을 누가 배타적이라고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김회권이 배타적 기독교인이 될 때, 김회권의 배타적 주장과 실천으로 이웃이 덕을 보는데, 누가 저의 배타성을 욕하겠습니까. 기독교가 우월하다고 배타성을 주장할 게 아니라, 진리의 배타적 실천에 우리는 주력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신학에 바탕을 두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정 위원/ 로잔언약권의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오래된 복음주의의 실수를 회개하고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면서 문화 명령, 사회적 참여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 말하는 밑바닥, 억압받는 자들의 자리까지는 침투하지 못했습니다.

김 교수/ 사실 로잔언약은 찻잔속의 태풍 같은 면이 없지 않습니다. 해방신학은 근본적으로 라틴 아메리카라고 하는 90%의 절대 민중 계급이 상존하는 토양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한 넥타이 그룹이 있어서 해방신학적 영웅이 불필요했지요.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는 깨어 있는 시민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메로 같은 사람이 나와야 했어요. 라틴 아메리카는 한국처럼 단일 사회가 갖는 첨단의 소통 능력, 정치적 결집의 신속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터사클 다이어리>에서 볼 수 있듯이, 남미의 민중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가 안데스 산맥 일대를 다니며 직접 본 절대적으로 비참한 민중과 동일시되는 게릴라가 될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교육 수준도 낮고 가톨릭 역사 때문에 역동적 기대, 종말론이 부재했기 때문에 고도로 자유로운 신학자들의 입을 통해 예언자적 메시지가 전달된 겁니다. 그런데도 민중 전체가 한 것 같은 힘이 나왔어요. 몇 사람을 통해 말이죠. 지금 라틴 아메리카 나라에 좌파 정권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에 해방신학의 영향력이 분명히 작용했을 것입니다. 해방신학의 영적 교구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정 위원/ 그렇다고 해방신학의 영성을 시대와 문화와 시간적 간격이 있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서 일대일로 적용할 수도 없는 형편이지요.

김 교수/ 한국에서 해방신학적 영우주의가 나오지 못한 건, 박정희처럼 누구나 명백하게 타도해야 할 세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박정희가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분산돼 있어요. 박정희 이미지가 이건희, 이명박, 교황같은 종교 권력자, 목회자 등 여러 분야의 여러 사람들에게 분산돼 있어요. 그러니 각 부분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죠. 이제는 하나의 강령으로 뭉치기 힘듭니다. 해방신학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에누리 없이 성육신 정신일 겁니다. 계급과 특혜를 거부하는 자기강하지요. 박원순 서울시장이 잘 할 거라고 봐요. 아스팔트에 코를 대고 방사능을 맡고, 노숙자가 입원한 병원에 가는 건 간단한 것 같지만 아무나 못하는 겁니다. 해방신학은 민중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아우성치는 바닥 백성들의 가슴을 여는 신학적 토양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미분화된 민중신학적 투쟁, 그것은 적이 아닌 내 안에 솟아 있는 욕망과의 투쟁인거죠. 이건희를 비판하는 마음으로 김회권은 김회권 안에 있는 기득권(이건희)에 투쟁해야 하는 거죠. 오늘날의 박정희는 한국교회의 악한 담임목사들이며 종교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은 정당성 없는 긴급 조치를 남발하면서 의로운 장로들을 잘라냅니다. 부목사를 학대하면서 교회 성장을 추구합니다. 이런 목사들이 박정희의 매트릭스적 복제 인물인 셈이죠. 또 경제 발전을 가져오긴 했지만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기업가도 박정희 복제 인간입니다. 실험실 돈 떼먹는 교수, 조교를 착취하고 성희롱하는 교수가 박정희입니다. 이렇듯 부문별로 박정희가 많기에, 민중신학을 읽을 때 죽은 박정희가 아니라 내 안의 기득권(박정희)을 극복해야 합니다. 해방신학자들은 기초 공동체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악과 부당한 권력욕과 싸워 이겼습니다. 해방신학자 구띠에레즈는 페루 리마의 <성 바로톨로매 더 라 카사스 연구소>를 통해 인디언을 위해 일하다 죽은 라 카자스의 생애를 기리고 축성합니다. 구띠에레즈는 성경 텍스트를 민중의 고통이라는 텍스트와 융합해서 해방과 구원의 하나님을 믿도록 인도했습니다. 민중이 서로 돌보고 신뢰하는 게 악을 이기는 것임을 가르친 겁니다. 해방신학은 제도교회를 건강하게 재활성화했어요. 그런데 민중신학은 그걸 못했어요. 민중신학자들이 목회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거든요. 민중신학 계열의 인물들이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현실 정치의 수혜자가 되었을 때 어땠는지를 보세요. 그들이 실제로 민중을 지향했다면 장관이 아니라 교회 갱신과 권력의 부조리를 위해 투신했어야 하지요. 지나치게 투쟁하는 사람은 권력 지향적일 수 있기에 늘 조심해야 합니다.



정 위원/ 박정희가 너무 많은 영역에 복제되어서 자신을 성찰해야 하는, 개인 윤리적 영성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 개신교는 사회의식이 배제된 개인 영성에 함몰되어 있었기에 실패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회 윤리 의식 없이 개인 영성이 설 수는 없겠지요.

김 교수/ 최근 몇몇 목사들의 사태를 보면 사회적 윤리나 지향 없이 개인 영성만 추구하는 게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만열 교수, 홍정길 목사, 손봉호 교수를 보면, 개인 윤리를 올곧이 지키니까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구나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참된 개인 윤리를 확정하고 세운 사람은 사회적 상관성이 뚜렷한 메시지에 힘을 낼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사회적 지향성이 뚜렷한 발언은 안 하고 개인만 돌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실 개인도 돌보지 않은 거죠. 그럼에도 방금 정지영 위원의 지적에 동의하는 것은 사회적 지향 없는 개인 윤리만 말했다면 분명 한계가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손봉호, 이만열 교수가 사회적 발언을 면피하면서 개인 윤리를 강조했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그런 분들은 그 둘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사회적 지향이 뚜렷하면서 자신을 쳐 먼저 복종시킨 거죠.


정 의원/ 교수님에게 지적으로 가장 도전을 준 인물을 든다면 어떤 분이 있을까요? 그리고 구약학자로서 자주 사용하시는 구약 주석은 어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김 교수/ 아무래도 가깝게는 김세윤 교수가 아닐까 싶어요. 대학 시절 김세윤 교수가 관악지구 ESF에 와서 5시간씩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보고 큰 놀람과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부생이 듣기에는 쉽고 평이하게 그러나 매우 심오하게 구원론, 하나님 나라 같은 주제를 강의해 주셨는데 신학 박사의 지적 위력을 충분히 느꼈어요. 저는 누구에게 쉽게 존경한다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분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설복당한 거지요. 김만성 목자님과 이승장 목자님이 늘 쉐퍼와 본회퍼의 책을 소개해 주셔서 영성과 지성의 겸비를 위한 독서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구약 주석으로는 하나님에 관한 경외감을 상실한 독일이나 영미권의 주석류는 보질 않고 유대교 신학자들의 주석 시리즈인 JPS Torah Commentary를 주로 사용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직접 원어로 보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정 위원/ 개인적으로는 교수님의 설교와 글을 읽으면 복음의 본질에 대한 특출한 애정과 그것을 담아내는 야성, 특히 사상사의 흐름을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사상사에 대한 지식을 위해 평소 어떤 책들을 추천해 주시는지요.

김 교수/ 주로 추천하는 책은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후스토 곤잘레스의 <기독교 사상사>입니다. 전에는 제임스 리빙스턴의 <현대 기독교 사상사>를 추천했습니다. 이 책은 현대 기독교 사상사의 형성과 영향에 관한 교과서로, 기독교 사상과 현대 철학, 역사학, 자연과학과의 만남을 명쾌하게 분석했습니다. 매우 많은 사상가들을 직접 인용, 해석하고 있어서 교양도서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정 위원/ 바쁘신 교수 사역과 목회로 심신이 많이 지치실텐데 영적 회복을 위해 평소에 자주 들춰보는 책이 있으신지요.

김 교수/ 지금은 자주 보지 않지만 영국 청교도들의 신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영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리차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를 즐겨 읽곤 했습니다. 청교도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인데 삶의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을 십자가의 빛 아래에서 밝고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영혼에 위로를 주는 책이죠. 17세기의 유명한 영국 청교도 설교가였던 윌리암 브리지의 <영적 침체에 빠진 자들을 위한 회복>(A Lifting up for the Downcast)도 자주 봅니다. 또 다른 책은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필생의 저작인 이 책은 기독교 신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의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유산들인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강해한 목회적인 글입니다. 그의 철저한 성경적인 생각은 항상 저를 감동시킵니다.


정 위원/ 교수님은 복음주의권에서 전방위적 지식을 갖춘 지성인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평소 문, 사, 철, 언의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셨고요.

김 교수/ 이 평가는 과장된 평가라고 봅니다. 다만 그런 방향으로 성장하고 싶은 열망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인문학을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옹호하는 학문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영적이고도 육적인 기본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학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정의된 통전적 인문학은 경제학을 그 하위분야로 거느리는 학문이 됩니다. 예를 들면 대천덕 신부의 <토지와 자유>는 고전적인 인문학 도서라고 봅니다. 이 책은 토지도 없는데 투표의 자유를 준다고 해서, 그 자유가 인간 존엄을 노예 상태로부터 구해 주는 자유가 아님을 강조합니다. 대천덕 신부의 말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먹을거리가 해결되지 않고 실업의 공포가 있는데 인터넷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를 준다고 그게 자유입니까? 땅에서 나는 소출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충족시켜 주는 게 자유입니다(신 15:11). 이 인간옹호학, 즉 인문학의 진수에 신학이 있다고 봐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항구적 믿음(신학)이 있기 때문에 그의 피조물도 중요하다고 여길 수 있다(인문학)는 것입니다. 진화론으로는 그런 인간 존중의 토대가 생기지 않아요. 인문학의 중심은 지성과 감정의 통합입니다. 동정심 넘치는 지성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인문학은 삶의 터전을 잃고 인간 존엄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 난민, 나그네, 고아와 객과 과부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을 표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통치를 못 믿는 게 인간 자유의 가장 비참한 모순이라고 봅니다. 인문학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걸 고쳐내는 것이기에 실천적입니다. 그 진수에 기독교가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 믿기 전에는 문학을 읽었습니다. 포괄적 사회과학은 많이 안 읽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구약의 틀 안에서 예수님을 보니 인간의 존엄, 자유, 고귀한 행복 추구권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회과학의 중요성에도 눈뜨게 된 거죠. 폭넓게 글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든 것에 관심과 사랑을 갖고 계신 하나님 마음 때문입니다.


정 위원/ 교수님의 설교와 글에는 여러 분야에 걸친 통찰들이 보입니다. 그중 경제학에 대한 매우 진보적인 식견을 만날 수 있고, 특히 평소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해 오셨지요.

김 교수/ 최근에 목민포럼이라는 연구재단에서 연구기금을 받아 ‘구약성경과 하나님 나라 경제학’이라는 논문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했습니다(5월과 10월). <복음과상황>에도 하나님 나라 경제학에 관한 논설을 기고했습니다. 제가 이런 글들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작금의 경제학은 인간의 가치를 아주 저하시키는 저급 경제학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GDP를 늘리려는 것은 모순이기에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고취시키는 무형의 정신적 에너지를 경제적 자산으로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을 상상하도록 해 줄 경제학 책을 줄곧 읽어 왔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조순의 <경제학 원론>을 접한 이후.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러스킨의 책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 책들도 꾸준히 읽어왔고요. 이런 독서를 돕는 데 도움을 주는 길라잡이로는 <녹색평론>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지속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성경 외에 이런 책들이 제 하나님 나라 경제 관련 글에 가장 많이 인용됩니다.


정 위원/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그 사람의 서재’ 코너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실용적 독서에만 관심을 갖고 있고, 현실에 대한 본질적이고 형이상학적 대답을 외면하는 지성이 메말라가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독서와 책이 어떤 의미인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교수/ 종이책과 멀어지는 현실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종이책은 문명사의 마지막까지 잔존할 것이라고 봅니다. 지식 저장의 항구적 안정성 면에서 전자책을 능가한다고 봅니다. 전자책은 전기에너지에 의존하지만 종이책은 태양에너지에 의존합니다. 저는 영어사전을 전자책으로 쓰는 사람들에게 종이사전을 보라고 합니다. 암기력에서 차이가 나거든요. 어떤 이들은 전자책이 들어오면 종이책이 불필요해질 거라고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종이는 나무입니다. 나무와 전자의 차이는 엄청 큽니다. 종이책이 그 범위는 줄겠지만 그 나름대로 역할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정보 획득 수단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단기간 성공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선인들의 누적된 지혜를 책을 통해 쌓은 사람들은 그들의 성공을 유지하고 존속하고 번영시키는 결정적 자산을 갖는 것입니다. 저는 ‘영광의 무게’를 견딜 힘이 독서에 있다고 봅니다. 인격을 고상하게 만들고, 삶의 속물적 즉흥주의를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 독서라고 믿습니다. 독서로 단련된 사람은 중대한 판단의 기로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기독교의 선인들, 지혜로운 경륜서를 읽지 않고 임기응변을 가르치는 매뉴얼만을 보고 살면 단기간 작은 일에 성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크게 형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류의 누적된 집단 지혜의 인도를 보여 주는 필수 고전의 독서 없이는 가장 중대한 순간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실패합니다. 자기 절제, 자기 관리, 고상한 삶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은 독서의 힘에 있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급행 출세해서 영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금방 망할래? 아니면 늦게 출세하지만 영광의 무게를 감당할 근본을 쌓을래?’ 라고 자주 질문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비가 와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독서를 한 사람은 뇌물을 포기할 수 있는 결단, 꽃뱀, 미인계를 이길 수 있는 결단에 비교적 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필수 교양 독서 거치지 않고 고시 패스하는 거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영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런 걸 시범으로 보일 사람이 몇 사람 없는 게 아쉽지만, 이것은 제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을 통해 입증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은 자의 독서가 이런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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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기독 지성의 서재를 방문해 그분들의 삶과 사상을 살펴보았던 ‘그 사람의 서재’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2년간의 기획을 마감합니다. 철학자와 신학자, 목회자와 현장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부르심을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있는 이들이 걸어 온 인생길과 지성의 궤적을 추적했던 이 코너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독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 주셨던 분들과 많은 관심과 반응을 주셨던 독자, 참여해 주셨던 분들에게 감사의 말과 지면상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함께 책으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그만 물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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