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교회교육과 상담

팬인가, 제자인가

이창무 2015. 5. 1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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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인가 제자인가

저자
카일 아이들먼 지음
출판사
두란노 | 2012-04-16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제자, 가장행복한 부르심!남김 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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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인가, 제자인가


카일 아이들먼 지음 ‘팬인가 제자인가(not a fan)’ 요약

   

Part 1 가장 행복한 부르심, 나를 따르라


Chapter 1 (팬인가, 제자인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인가? 이 질문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제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열심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해도 정작 심판의 날 그분이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마7:23).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널려 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 있게 제자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제자가 아니라면 뭘까? 그들은 그냥 ‘팬’이다. 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전적 정의는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다. 팬은 선수가 사인한 운동 셔츠를 벽에 걸어두고 자동차 뒤에 온갖 범퍼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지만 정작 경기에 나서지는 않는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을 하지만 경기를 위해 희생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자꾸 패하면 그 좋아하던 마음도 조금씩 식어가고, 심지어는 다른 팀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팬은 어디까지나 팬일 뿐이다.


요즘 예수님 주변에도 팬이 많다. 팬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예수님을 응원하지만 반대 상황에 이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을 돌려 다른 선수에게 들러붙는다. 예수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도 그분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관계 중에 스타와 팬의 관계는 없다. 오늘날 교회의 큰 문젯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정작 그리스도를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는 팬들이다. 온갖 혜택을 바라며 예수님의 주위로 몰려드는 팬들은 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할 만큼 그분과 가깝진 않다. 팬은 단순한 열광을 진정한 헌신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깊은 친밀감으로 오해한다.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때우려 한다. ‘팬’의 가장 흔한 증상 중 하나는 자신이 제자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팬인가 제자인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으로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이 질문에 답하기 때문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제자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팬에 불과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 비추어 자신과 예수님의 관계를 평가하며, 그렇게 평가한 결과가 평균 이상이면 썩 괜찮다고 스스로 안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하는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때에만,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제자(follower)가 되는 것이다.


Chapter 2 (말뿐인가? 행동인가?)  말로만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종교 지도자들의 엘리트 집단인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었고, 널리 존경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는 일찌감치 예수께 열광해 왔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분의 놀라운 기적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예수님을 따르면 잃을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남몰래 예수님의 팬으로 활동하면 잃을 게 별로 없었지만 제자의 길에는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팬은 약간의 손질만을 할 생각이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수리를 말씀하신다. 팬은 약간의 조정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오지만 예수님은 완전 분해 수리를 계획하고 계신다. 팬은 몇 가지 장식을 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완전 개조를 원하신다. 팬은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원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말뿐인 믿음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 맺는 믿음을 찾고 계신다.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따르지 않는다면 팬에 불과할 뿐이다. 대개 우리는 뭔가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거나 감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을 실제로 따라야 진짜 믿음이다. 따르는 것은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손발로 움직이는 것이다. ‘믿음’의 메시지와 ‘따름’의 메시지가 분리될 때 균형이 깨지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메시지에서 따름의 메시지를 떼어 내면 믿음은 곧바로 죽어 버린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분을 따르게 되어 있다.


니고데모 앞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조금도 숨기시지 않으신다. 그 누구도 대가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모세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무시무시한 바로 왕 앞에 서야 했고, 노아는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뭇사람의 조롱을 견뎌가며 방주를 지어야 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따른 좌로 사자 굴에 던져져야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진정한 제자의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라면 밤낮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그러려면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고소할 빌미를 찾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었고, 그 중에는 니고데모도 있었다.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옹호한다(요7장). 이 순간 니고데모는 단순한 팬의 길을 떠나 제자의 길로 접어 들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장례식 준비가 한창일 때, 니고데모는 비싼 몰약과 침향을 가지고 온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숨었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에 말로만 표현 되었던 믿음이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했다.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은 팬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제자로 거듭난 것이다.


Chapter 3 (지식인가? 친밀함인가?) 반쪽짜리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이라는 종교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모르는 게 없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는 못했다. 바리새인처럼 팬들도 머리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연구하지만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는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넘쳐나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는 못한다. 지식과 친밀함, 이것이 팬과 제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점 중 하나다.


팬은 지식과 친밀함을 혼동한다. 팬은 예수님에 관해 아는 것과 그분을 진정으로 아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교회 안에 팬이 많은 것은 교회의 교육 방식이 지식만을 쌓아줄 뿐 친밀한 관계는 만들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은 ‘알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앎은 단순한 지식보다 더 깊은 차원의 앎을 의미한다. 남편과 아내의 연합을 지칭하는 표현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앎에 대해서도 똑같이 사용된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예수님이 제자로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다. 예수님을 친밀하게 알아야 제자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으셨다. 이런 만찬회에는 몇 가지 중요한 에티켓이 있었다. 귀빈이 오면 입맞춤으로 환영하는 것이 관례였다. 정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주인이 직접 발을 씻겨 주었고 머리에 부을 기름도 제공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입맞춤의 환영을 받지 못하셨다. 발을 씻어주는 과정도 없었다. 머리에 부을 기름도 없었다. 시몬은 평생 성경을 연구해 온 사람이지만, 그는 정작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성경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정작 예수님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변화를 받았던 ‘죄를 지은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내고, 그 발 위에 향유를 통째로 가져다가 붓고 입맞춤을 한다(눅7:44-46). 결국 모든 지식을 갖춘 종교 지도자는 팬이었고, 예수님께 친밀한 애정을 표현했던 창녀는 제자로 판명이 났다. 이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눅7장의 이 여인처럼 예수님과 친밀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는가? 창피를 무릅쓰고 예수님께 애정을 표현해 본 적이 있는가?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가?


Chapter 4 (많은 애인 중 단 한 명? 단 하나뿐인 애인?)  대가를 제대로 알고 시작하라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눅14;25-26)

예수님의 관심사는 헌신의 깊이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가족,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미워하라’는 표현은 ‘나를 더 사랑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안에서 여러 사랑이 첫 번째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해보자. 예수님, 배우자, 자식, 친구, 형제가 출발선에 쭉 늘어서 있다. 이 경주에서 예수님이 일등으로 들어오면 끝일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자리를 위한 경주의 트랙에서 그분 홀로 달리시는 것이다.


팬은 예수님을 여러 애인 중 한 명으로 생각한다. 그 중에 좀 나은 팬은 예수님을 여러 애인 중 가장 아끼는 애인으로 삼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분명히 못 박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단 하나뿐인 애인이 되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다른 누구와도 우리의 사랑을 나눌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분을 따르려면 절대 한 눈을 팔지 말고 전심으로 따라야 한다. 다음 질문들은 예수님이 당신에게 여러 애인 중 한 명인지 하나뿐인 애인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1. 무엇을 위해 돈을 쓰는가?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시간과 돈을 쓰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이 무엇보다도 돈 얘기를 자주 꺼내신 것은 돈이 예수님의 경쟁상대로 떠오를 때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영원한 만족을 주겠다는 돈의 거짓 약속을 믿고서 예수님을 헌신짝처럼 내버린다. 우리는 돈과 예수님을 동시에 좇을 수는 없다. 두 길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고 오직 한 길만 선택할 수 있다.


2. 힘들 때는 어디에서 위로를 얻는가?

삶이 고달플 때 누구 혹은 무엇에 의지하는가? 부모나 배우자? 냉장고에 먹을거리? 아니면 시름을 잊고자 일에 파묻히는가?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경쟁상대가 될 수가 있다. 가족과 친구에게 위로를 얻는 것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대신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다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면 진정으로 믿는 대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생의 쓴 맛에 괴로워했던 순간을 떠올려보라. 그때 누구에게 달려갔는가? 그 답을 보면 당신이 진심으로 따르는 대상을 확인할 수 있다.


3. 어느 때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가?

언제 불같이 화를 내는지를 보면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만약에 세상적인 것 때문에 하루를 망칠 정도라면 그것을 필요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물론 실망스러운 일을 겪으면 화가 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화를 낸다면 그 화의 대상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증거다.


4.어느 때 가장 신이 나는가?

우리를 실망시키는 대상 못지않게 우리를 흥분시키는 대상도 예수님의 경쟁상대일 수 있다. 스포츠, 게임, 드라마, 일, 외모 등 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훔쳐가는 주범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 함은 그분만을 따른다는 뜻이다. 팬은 예수님을 자기 마음의 중심 보좌로 모실 생각까지는 없다. 대신 그분을 마음의 소파에 눕히고 베개 하나만 던져줄 뿐이다. 팬에게 예수님은 마음이라는 공간을 나눠 쓰는 수많은 손님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한 조각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돈이나 직업, 심지어 가족과도 우리를 공유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오직 그분만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다른 모든 대상을 미워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반쪽짜리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오직 전심을 쏟는 관계만을 원하신다. 따라서 “나는 제자다”라고 말하려면 그 대가를 제대로 알고서 해야 한다.


Chapter 5 (율법인가? 은혜인가?) 종교 활동을 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당신은 팬입니까? 제자입니까? 그렇게 물으면 팬은 자신 있게 “제자”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노력하거나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제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팬들은 열심히 따르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따르는 대상이 예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표적을 겨냥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종교적 규칙과 의식을 따르고 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라는 팬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어느 모로 봐도 제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경에 관한 한 모르는 게 없었고, 특히 율법 준수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종교 규칙은 예수님이 가장 중시하는 표적이 아니다. 종교 규칙을 잘 따르면 외양은 그럴듯해진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의 속에 있다. 안타깝게도 이 종교 지도자들의 속은 겉만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팬이 그러하다. 마23장 설교에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라고 말씀하시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호되게 꾸짖으신다. 규칙을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는 생각은 보통 심각한 착각이 아니다. 이 종교 지도자들처럼 종교 규칙만 잘 따르면 제자인 줄 아는 팬들은 예수님께 쓴 소리를 들어 마땅하다.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의 역할을 맡았으며 타고나야 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집안과 상관없이 노력만으로 될 수 있었다. 사두개인들과 같은 팬들의 믿음은 태생적이다. 부모에게 물려받아 그리스도인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기독교 음악을 들으며 자랐지만 예수님과 사랑에 빠진 적은 없다. 마음으로 믿지는 못하고 부모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가 없어 믿는 척만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과 같은 팬들도 있다. 그들은 얼마나 열심히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믿음을 저울질한다. 그들이 겨냥하는 표적은 올바른 지식과 행동이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말과 행동과 다르다. 아무리 말과 행동이 반듯해도 그것만으로 예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는다.


이 종교 지도자들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위선이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들의 면전에 대고 그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했다(마23:5). 하지만 사람들이 보는 것은 그들의 가면일 뿐 진짜 모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형태의 팬이다. 그들의 믿음은 속으로는 썩어 있지만 겉으로는 더없이 깔끔하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행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꾸어진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관계보다 규칙을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율법의 글자 하나하나에만 얽매일 뿐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을 남용했으며(마23:16-17), 율법의 조문만을 지킬 뿐 그 정신은 놓치고 있었다. 여느 팬들처럼 그들은 모든 종교 의식을 힘들여 지키되 하나님의 사랑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는 못했다. 사랑보다 법을 중시하고 관계보다 규칙을 더 따지는 것은 엉뚱한 과녁을 겨냥하는 것이요 전형적인 팬의 증상이다.


예수님이 아닌 규칙만을 따르는 팬들은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있다. 이런 죄책감과 두려움의 키워드는 ‘노력’이다. 팬들은 실수를 만회하여 하나님의 눈에 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반면, 은혜의 키워드는 ‘완료’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벌을 대신 받으셨다. 예수님이 길이 없는 것에 길을 내신 덕분에 우리는 이미 완료된 일에 감사하며 자유롭게 살면 된다. 팬은 ‘노력’을 외치지만 제자는 ‘완료’를 축하한다.


팬은 평생 무거운 종교의 짐을 짊어지고 남들에게도 그 짐을 강요한다. 내면과 어울리지 않는 외양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하나님의 은혜를 얻으려고 규칙을 모조리 지켜보려고 해 보지만 날이 갈수록 파김치가 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종교에서 해방시키려고 오셨다. 기나긴 규칙의 리스트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 진짜 모습보다 더 좋은 척 하는 사람들, 종교로 인해 두려움과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들, 종교에 신물이 난 팬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고 말씀하신다(마11:28-30)


Chapter 6 (자신의 힘인가? 성령의 충만인가?)자신의 힘을 의지하면 여지없이 깨진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결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성령의 능력 없이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오래지 않아 증상이 나타난다. 그 증상은 바로 짜증과 분노다. 원하는 행동은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행동만 하게 되니 화가 나게 된다. “이 번만큼은 다를 거야”하면서 다짐에 다짐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매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애써 봐야 매번 실패하고 좌절할 뿐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면 인생의 무게에 무릎을 꿇고 만다.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고 싶은가? 그 출발점은 먼저 자신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훤히 드러내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자신의 약점을 인정해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들어올 여지가 생긴다고 말한다(“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9-10). 그러나 팬들은 좀처럼 약점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약점은 철저히 숨기고 강점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떠벌린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와 거하시면 우리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입지는 점점 좁아진다. 자신의 교만과 분노, 이기심, 정욕이 점점 밖으로 배출된다. 어둡고 지저분한 요소는 자꾸만 빠져 나가고 성령이 점점 충만해진다. 제자는 매 순간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그분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기도하며 살아간다. 반면 팬들은 제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다가 결국 제 풀에 쓰러지고 만다. 자기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면 녹초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능력을 주실 것이라 약속해 주셨다. 예수님의 제자는 홀로 여행을 마칠 수 없다는 진리를 아는 자다.


Chapter 7 (의무인가? 관계인가?) 예수님과 가슴과 가슴이 통해야 한다.

제자의 궁극적인 조건은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친밀한 앎이 있어야 한다. 팬들은 말과 행위만을 따진다. 말과 행위는 가시적이며 점수를 매기기 쉽다. 하지만 예수님은 친밀한 관계를 참된 제자의 조건으로 제시하신다. 착한 말과 행위는 모두 그분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신앙의 행위나 종교적 규칙의 준수나 찬미의 말보다도 서로를 깊이 아는 관계를 원하신다. 이러한 관계가 바탕을 이루지 못하면 아무리 대단한 예언과 귀신 쫓기와 기적도 허사다.


Part 2 가장 고통스런 부르심, 자기를 부인하라


Chapter 8 (열린 초대) 부르심은 자격을 따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한낱 팬으로 판명이 났지만, 그들이 팬이라고 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자기중심적으로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이 문제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예수님은 “아무든지”라는 말씀으로 초대의 메시지를 시작하신다. 그렇지만 무턱대고 따라오지 말고, 그분의 조건을 정확히 알고 그래도 원하는 자만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따라오라고 초대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을 따르는 법도 가르쳐 주신다. 세리였던 마태가 어둡고 얼룩진 과거를 뒤로 한 채 모든 걸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해서 당장 완벽한 사람으로 거듭난 건 아니다. 당장 겉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뒤에도 계속해서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다. 내 의지와 달리 팬으로 사는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예수님이 마태에게 하셨던 은혜의 초대를 매일같이 받아들인다. “나를 따르라”


Chapter 9 (열정적 추구) 불같은 사랑으로 예수를 따르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여기에 기록된 예수님의 초대에서 뒷부분은 참된 제자들에게는 완벽하게 이해가 가는 말씀이지만, 팬들에게는 그저 황당하기만 할 뿐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관계를 원하시는지 명확히 밝히신다. 이 구절에서 “따라오려거든”이란 말에 주목해 보자. 마음과 자원과 에너지를 모두 쏟아 붓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서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13:44).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면 전부를 걸고서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발견하면 값진 진주를 좇은 이 일꾼처럼 그분을 좇을 수밖에 없다. 팬은 너무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을 좇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놓아야 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의 투자임을 안다. 제자는 사랑을 위해 미친 짓도 서슴지 않지만 팬은 몸을 사린다. 팬들의 생각은 전부를 걸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적당히 하다가 여차하면 몸을 빼내겠다고 생각한다. 팬은 상처를 받을 위험 없이 즐기기만 원한다. 팬은 희생 없이 챙길 것만 챙겨 먹으려고 한다. 팬은 따라가지 않고 주춤거린다. 그렇다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모험까지 할 생각은 없을 뿐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4:19)

예수님을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좇을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감격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다는 사랑 이야기는 최고의 사랑 이야기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좇으셨다. 이 사랑을 알면 우리의 마음이 녹아내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셨기에 우리는 그분을 사랑한다.


여태껏 팬으로 살았지만 이제 제자가 되고 싶다. 그런데 영 마음이 동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고 싶기는 한데 무감동하고 냉담한 마음이 도대체 풀어질 줄 모른다. 얼마 전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를 꽤 깊이 연구했던 적이 있다.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리스트가 생긴 배경을 조사하던 중 한 가지 죄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태’는 죽음에 이를 만큼 치명적이지 않아 보였다. ‘나태’로 번역된 단어는 ‘아시디아(acedia)’이다. 내가 볼 때 이 단어를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영적 무관심’으로 번역하는 게 옳지 않나 싶다. 영적인 문제에 대해 ‘아무래도 상관없어’라고 말한다면 보통 심각한 죄가 아닌 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아들을 보내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마는 것, 이것이 아시디아(acedia)이며 팬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죽음의 질병이다.


Chapter 10 (완전한 포기) 인생의 근사한 권리를 모두 포기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제자로 초대하신다. 먼저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준 뒤에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제 청년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재물과 권세를 따를 것인가? 둘 다 가질 수는 없다.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서 예수님을 따를 길은 없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결국에는 비슷한 기로에 서게 된다. 세상의 길을 떠나지 않고서는 절대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예수님과 재물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에 이르자 결국은 재물을 선택했다. 청년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리려는가?


제자는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매일 선택하는 사람이다. 설령 자신의 전부를 잃는다 해도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는 모습, 이것이야말로 일편단심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깊은 사랑은 무엇보다도 희생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의 전부에 대한 권리를 양도해야 한다. 아무것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 즉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Chapter 11 (날마다 헌신) 죽고 또 죽으라

제자의 슬로건과 심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와서 죽으라(Come and die)”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부르실 때 와서 죽으라고 명하신다.”(본회퍼) 그리스도의 제자의 심벌은 바로 십자가다. 고문과 죽음의 도구가 예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심벌이다. 십자가는 로마인들이 유대인 같은 피정복민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처형도구다. 또한 십자가는 굴욕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만인 앞에서 죄인을 욕보이기 위해서였다. 죄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통과 고난의 길이다. 편안하게 십자가를 질 방법은 없다. 십자가는 어디로 메나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고난은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사람에게나 찾아온다고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따르면 만사가 순조롭게 풀려야 정상이 아닌가?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은 때로는 참을 수 없으리만치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감내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눅6:22, 딤후3:12, 빌1:29). 복음을 위해 아무것도 잃은 게 없다면 과연 진정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우리의 모난 행동을 깎거나 우리의 못된 성품을 미세 조정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신 것만도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가 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한다. C.S.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 점을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게 전부를 주라. 너의 시간과 돈, 일의 일부는 필요 없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육신을 고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 왔노라. 미봉책은 전혀 소용없다. 여기저기를 가지치기해 봐야 소용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무 전체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이빨을 갈아내거나 금을 씌우거나 구멍을 메워봐야 그때뿐이다. 아예 뽑아내야 한다.”


날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노라 결심해야 한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한 차례의 결심이 아니다. 매일같이 죽고 또 죽어야 한다. 이것이 자기 부인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아침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 매일 아침 제단으로 돌아가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 누가복음 9:23절에 기록된 주님의 초대다. 하지만 다음 구절에서 놀라운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Part 3 가장 충격적 부르심, 와서 죽으라


Chapter 12 (나는 ‘어디든지’간다) 예수님이 지시하면 어디든지 따라 나선다

예수님이 초대 메시지를 전하신 뒤, 누가복음 9장 끝 무렵에 진심으로 제자가 되고 싶은 것처럼 보이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면 자기 삶의 특정한 부분이 피곤해질 것을 알자 그들은 변명을 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과 조건을 협상하려는 것을 보니 그들은 팬이 분명하다. 57절에 첫 번째 팬이 등장한다. 그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찾아온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그러나 이 말에 예수님은 이 사람의 평온한 삶을 사정없이 뒤흔들만한 곳을 가리키신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려면 삶의 대대적인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 말 그대로,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 무조건 따라가야 한다. 이것을 알고 나면 예수님의 초대가 갑자가 큰 의미로 다가온다. 당신에게 예수님이 제발 가리키지 말았으면 하는 영역은 무엇인가? 혹시 집에서는 어떤가? 종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잘 따르다가도 집에만 오면 십자가를 현관 앞에 내려놓고 들어가는가? 집에만 들어가면 섬기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는가?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꾸만 따지는가? 격려해 주지 못하고 매번 지적하고 비판하는가? 집에서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못하고 냉담하게만 구는가? 일터에서는 어떤가? 평일 오전 9시면 많은 팬이 예수님을 차에 두고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 여기서 기다리세요. 퇴근할 때에 모시러 올게요.” 팬들은 일터로 들어가는 순간, 제자의 옷을 벗어 던진다. 팬은 탐욕을 ‘비전’이라고 부르며 정당화한다. 팬은 정직하지 못한 거래를 ‘사업수완’이라 부른다. 팬은 직장에서 그리스도인의 티를 절대 내지 않으면서 ‘배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를 문자 그대로 정의하면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든지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라 가면 남들이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하는 죄인 곁에 이른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 남들이 피하려고 하는 병자 곁에 이른다. 예수님을 따라 가면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면 가족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디든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는가?


Chapter 13 (나는 ‘언제든지’ 행한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꾸물대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첫 번째 예수 팬은 제 발로 예수님을 찾아 왔지만, 두 번째 팬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나로 먼저”라는 변명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뒤로 미루었고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따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은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단지 조금만 뒤로 미룰 뿐이다.’라는 꽤 이치에 맞는 변명으로 예수님을 따를 것을 미루며, 팬들은 그들의 미지근한 신앙을 정당화시킨다. 팬들에게 언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를 거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모두 “내일”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장은 유효기간이 있으며, 그 기간은 바로 ‘오늘’ 즉 ‘곧(마4:18-20)’이다. 제자의 사전에 내일이란 없다.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하실 때에는 당장 따라오라는 말씀이다. 내일이 아닌 오늘이다. 


팬들은 내일만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 내일은 비극이 닥치고 꿈이 깨진 뒤에야 비로소 오늘이 된다. 팬들은 수년간 미루기만 하다가 궁지에 몰려서야 다급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달려간다. 그제야 수천 조각으로 깨진 인생이나마 예수님께 의탁한다. 예수님은 속삭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내일의 땅에서 하나라도 더 잃기 전에 구해내기 위해 “나를 따르라”고 힘껏 외치고 계신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제 멋대로 가면 불행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물론 하나님이 그런 일을 일으키시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아오라고 신호를 보내며 경고해 주시는 것이다.


Chapter 14 (나는 ‘무엇이든지’ 드린다) 전부를 드리지 않으면 드리지 않는 것이다

누가복음 9장에 제자가 되고픈 또 다른 팬이 등장한다. 이 팬도 역시 예수님께 전부를 바칠 준비가 되어 보인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하락하소서”(눅9:61). 이 팬도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라고 말한다. 먼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자 한다. 그 때 예수님은 밭을 가는데 집중하지 않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의 비유를 드신다(62절). 이 남자의 요구는 그의 진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의 최우선 사항은 아닐 뿐이다. 하지만 전부를 내려놓고 따르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따르는 게 아니다. 이 사람도 예수님을 전심으로 따를 생각은 없다. 전부를 걸 마음까지는 없다. 예수님 말고도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그래서 자꾸만 그것을 돌아본다. 팬들은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있지만 그분과의 관계에만 얽매일 생각까지는 없다. 묵은 관계들도 그대로 유지하고 싶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분을 인생의 최우선 사항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우선 사항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을 누구와도 나누길 원치 않으신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절대적인 사랑과 온전한 헌신뿐이다. 예수님이 전부를 요구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그 한 가지가 그분의 자리를 대신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가지만 빼고 나머지를 전부 그분께 드린다 해도 그 한 가지가 우상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앞에 계신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뒤에 있는 뭔가를 돌아보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우상이다. 그 한 가지를 포기할 때 마침내 오랫동안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만족이 찾아온다. 세상적인 것을 너무 소중히 여기면 그것이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따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서 “뒤죽박죽이 된 사랑(disordered loves)”이라 명명했다. 우리 주변의 것들을 사랑해야 하지만 도에서 지나치면 문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 위치에서 당장 따라오라고 말씀하신다. 출발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혼자 힘으로 목적지 가까이로 갈 필요도 없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의 손을 뻗어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있는 모습 그대로 따라오라고 하신다.


에필로그 : 내 마음 속의 윌리엄 보든의 세 문장

고교 시절 윌리엄 보든의 전기를 읽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주님을 섬겼다. 그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될 것이다. 1800년대 말 낙농회사의 상속자로 태어나 억만장자였던 그는 예일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수백만 불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버린 채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머나먼 이슬람교도의 땅으로 떠났다.


윌리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여행을 권했다. 그리하여 유럽과 아시아, 중동을 여행하던 중 그는 복음이 닿지 않는 곳으로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선교에 삶을 바치겠다는 편지를 부모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경책에 문장 하나를 썼다. “남김없이”


윌리엄은 예수님을 따르려면 온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예일대학에 들어간 그는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한 친구와 함께 아침마다 성경을 일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눈만 뜨면 예일대학 내에 성경읽기와 기도 모임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가 4학년이 되자 그럼 모임이 1,000개에 달했다. 당시 그는 일기장에 “늘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리라”라고 썼다.


또한 대학 시절 그는 뉴헤이븐 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들을 돕기 시작했고, 알코올 중독을 비롯한 중독자들의 갱생을 돕는 예일 호프 미션이란 단체도 세웠다. 그는 재학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졸업 후 그는 성경책의 뒷면에 다시 한 문장을 썼다. “후퇴 없이”


그는 세계 선교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중국 간쑤 성에 복음을 전하가로 마음을 먹고, 중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아랍어를 배우고 이슬람 지역 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건너갔으나 그곳에서 척수막염에 걸려 스물다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카이로에 묻혔다. “후회 없이”


예일 대학의 영적 부흥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했던 그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 기억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성경 책 속에서 세 개의 문장이 발견되었다.


남김 없이(No Reserves).

후퇴 없이(No Retreats).

후회 없이(No Regrets).


생각해 볼 문제


(1) 우리 안에 있는 팬의 모습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자신을 돌아보면서 발견한 점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2) 우리가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 대가를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나요?

(3) 제자 양성의 성공담 혹은 실패담을 나누면서 이 책의 주제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고찰해 보세요.

(4) 우리가 섬기는 양들을 팬이 아니라 제자가 되도록 양육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 양성 방안에 대해 함께 토론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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