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성탄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창무 2017. 12. 17.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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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성탄 제 1 강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제가 어릴 적 한 때 유명했던 미니시리즈로 "뿌리"가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미국의 한 흑인이 도대체 누가 내 조상인가에 깊은 문제의식을 갖고 뿌리를 캐어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의 조상 중에 아프리카 잠비아 지역에 살다가 미국에 노예로 끌려 온 '쿤타킨테'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쿤타킨테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린 드라마가 바로 '뿌리'입니다. 제가 얼굴이 까무잡잡하다고 해서 붙여진 어릴 적 별명이 ‘쿤타킨테’이기 때문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마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설명하기 위해 뿌리를 찾습니다. 그 뿌리가 예수님의 족보와 성령 잉태 사건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세상의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책이 무엇입니까? 족보입니다. 족보라는 말만 들어도 어디선가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계보라는 말은 족보라는 말입니다. 보통 신약성경을 읽어보려고 할 때 신약의 첫 장인 마태복음부터 읽게 됩니다. 그 첫 부분이 하필이면 족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역시 성경은 재미가 없어' 하면서 첫 장부터 포기하곤 합니다. 그러면 마태는 마태복음을 왜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했을까? 잠 안 오는 사람들에게 평안한 잠을 주기 위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 마태복음의 주독자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혈통 중심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려면 족보부터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마태는 얼핏 보면 딱딱하고 지루해 보이는 족보 속에 놀라운 메시지를 감추어 놓았습니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알고 보면 이 족보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족보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언약의 성취자라는 사실입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0여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중에서 유독 두 사람만을 콕 집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아브라함과 다윗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은 죄의 저주 가운데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히 하리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한 왕을 통하여 평화와 공의와 자비로 다스려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소망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온 인류의 소망이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 소개한 까닭은 바로 예수님이 이 언약의 성취자이심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 역사의 드라마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마침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아브라함의 씨이자 다윗의 자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은혜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우봉 이씨 대사간공파의 18대손입니다. 제가 어릴 때 큰 집에 가면 할아버지께서 제일 먼저 다락에서 족보를 꺼내셔서 한 시간 동안 족보 교육을 시행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가 족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제 어머니의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냥 전주 이씨라고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종종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에도 여자 이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에는 5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것 자체가 매우 파격적인 일입니다. 여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왕 여인의 이름을 넣는다고 하면 어떤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아무래도 열국의 어미 사라는 꼭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이삭의 아내이자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가 빠지면 섭섭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족보에는 사라도 없고 리브가도 안 나옵니다. 대신 족보에 이름을 올린 여인들은 다말과 라합과 룻입니다. 다말은 누구입니까? 창녀로 위장하고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은 스캔들의 주인공입니다. 라합은 누구입니까? 가나안 족속 이방 여인이었을 뿐 아니라 직업은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셋 중에는 좀 나은 편이긴 하지만 근본은 모압 출신의 가난한 이방인 과부일 뿐입니다. 이 세 여인들은 모두 신분이 비천하거나 도덕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메시아의 족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여인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습니다. 다말은 어떻게 해서든지 언약의 계승 역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라합에게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이름이 메시아의 족보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말해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은혜의 역사요 믿음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누구를 포함시킬 것인가를 두고 인간적인 자격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조건을 보고 탈락시키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고 허물이 큰 사람이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만 은혜로 부르시고 믿음이 있는 자를 구속 역사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여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모든 조상들 가운데 최고의 영웅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 왕이야말로 조건과 자격을 제대로 갖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왜 밧세바라고 하지 않고 굳이 우리야의 아내라고 표현했을까요? 남의 아내에게서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서 다윗의 죄를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이 치명적인 죄 때문에 족보에 낄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회개하였을 때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그 증거로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사이에서 낳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구속 역사를 이어나가도록 하셨습니다. 영웅 다윗도 자기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족보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어디 다윗 뿐이겠습니까? 사실 족보에 등장한 모든 등장 인물들은 자기가 잘 나서 거기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큰 은혜를 입은 사람 중에는 저자 마태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기 위해 자료 조사를 했을 것입니다. 거기서 다말과 라합과 룻의 이름을 발견하고서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나 마태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들 역시 나처럼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했었구나!" 아시다시피 마태는 전직이 세리였습니다. 동족의 피를 뽑아 로마에게 바치고 자신의 배를 채우는 탐욕스러운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이런 마태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당당히 열 두 사도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게 하셨습니다. 친로마 인명사전에 등재되어 두고두고 욕을 먹을 이름이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하는 이름, 성 마태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태에게 임한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였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마태뿐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원수 바울을 은혜로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노예선의 무자비한 선장이었던 존 뉴턴을 부르셔서 한 영혼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랑의 목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만한 안티크리스천이었던 저를 부르셔서 성경 선생이요 말씀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격이 있어서 쓰임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격이 없으면 없을수록 분문의 세 여인들처럼 더 빛이 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동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의 역사입니다. 자격 없는 우리를 다만 은혜로 부르셔서 구속 역사에 동참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낳고'라는 단어입니다. 낳고... 낳고... 낳고의 연속입니다. '낳고'라는 말이 40번이나 나옵니다. 워낙 많이 나오다 보니 낳는 일이 별 대수인가 싶습니다. 그러나 조그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족보 안에는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낳은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첫 조상 아브라함부터 대가 끊어질 위기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나이가 75세였고 25년이 지난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의 탄생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이삭도 리브가와 결혼한 지 20년 만에야 야곱을 얻었습니다. 8절에 유다의 요람왕이 나옵니다. 그가 죽은 후 쿠데타로 집권한 아달랴 여왕이 다윗 왕가의 씨를 말리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이 대가 끊어질 뻔 했습니다. 이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린 왕자 요아스를 성전에 숨겨서 키운 덕분에 겨우겨우 다윗 왕조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위기는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일입니다. 나라가 망해버렸으니 다윗 왕조는 물론이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속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족보가 11절에서 끝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2절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이후에도 낳고 낳고의 역사는 계속 되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 예수가 탄생하셨습니다. 마침내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언약이 이루어지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주로 한 일이 언약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기로 했던 서약을 저버리고 수많은 우상들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전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반발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언약을 다 깨버렸으니 하나님께서도 언약을 지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낳고 낳는 역사를 계속 되었습니다. 인간은 처참히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죄와 허물, 실패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성취하신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국 교회와 캠퍼스의 상황이 낳지 못함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주일학교에 올 학생이 없어서 문 닫는 교회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캠퍼스 선교단체들마다 제자 양육이 잘 되질 않아서 근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백 명 학생 제자 양성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 왔는데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제가 네이버 UBF 공식 카페에 'UBF가 세대를 이어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공지 글로 채택 되어서 현재 메인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가 세대를 이어서 하나님을 섬길 사람들을 낳고 키울 수 있을까 정말 우리의 큰 고민이고 과제입니다. 만약 이 일에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린 일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봐도 대가 끊어질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시로 넘어지고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지더라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소망 가운데 다음 세대를 낳고 키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낳고 또 낳는 역사를 계속해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까지 우리를 구속 역사의 계승자로 사용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하고 아직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유대의 결혼 풍습은 현재 우리들과는 조금 달라서 약혼만 해도 법적으로는 결혼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혼 기간은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시되 법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실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져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된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술 퍼 마시고 장인어른 집에서 가서 다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여기서 요셉이 의롭다는 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법 앞에서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법 앞에 사는 사람으로서 요셉은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어떻게 끊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마리아를 비난하면서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욕을 먹고 요셉은 동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반면 조용히 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반대로 요셉이 욕을 먹고 마리아가 동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요셉은 정말 멋진 남자입니다. 요셉이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의 근본정신이 긍휼이고 사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칼날을 마구 휘두른다고 해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의로운 것은 항상 거룩함과 긍휼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 신사적인 결정은 구속 역사 측면에서 보면 큰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파혼하게 되면 태어나실 예수님은 다윗 가문과 아무 상관없는 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자초지종을 일러주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천사는 마리아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결코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 데려오는 일에 거리낄 이유가 없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역사적인 인물들 중에는 비범한 방식으로 탄생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삭이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삼손도 있고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은 그 이전의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분, 특별한 분이심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천사는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를 볼 때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하지만 이 말은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마다 생각하는 구원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이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에게는 돈벼락을 맞는 것이 구원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기말고사를 본 HBF 형제 자매님들은 찍은 것이 다 맞는 것이 구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천사가 부연설명을 한 마디 더 해 주었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의 구원은 죄에서 구원입니다. 여기서 '에서'라는 말은 '~ 밖으로(out of)'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의 영역 안에 갇힌 사람을 죄의 영역 밖으로 꺼내오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군 오중사가 판문점을 통과해서 남한으로 귀순했습니다. 막판에 오중사가 뒤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경계선을 넘어 남측 관할 지역으로 들어온 바람에 우리 군과 의료진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김씨 일가의 지배를 받는 북한 땅에 살았던 오중사처럼 사람들은 죄가 지배하는 영역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여기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와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 나라에서 의와 은혜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어둠과 죽음의 나라에서 빛과 생명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아무리 경제와 정치와 사회를 다 바꾸어도 여전히 그 배후에서 죄가 지배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잘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죄에서 구원이 가장 필요하고 절실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태어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유일한 분이십니다.


저자 마태가 예수님의 탄생기록을 여기까지 썼을 때 선지서의 한 말씀이 '두둥'하고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은 이미 8백 년 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셨던 말씀을 성취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에게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자를 보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말해 줍니다. 김지하 시인이 쓰고 김민기가 멜로디를 붙인 '금관의 예수'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의 후렴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절규하듯이 탄식하듯 부르는 이 후렴구를 듣다보면 가슴이 아려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일들만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 구름 위에만 계신 것 같고 이 땅은 외면하고 계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때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하는 탄식과 절규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압제는 해가 갈수록 강도가 세어지고 경제는 피폐해질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선지자 한 명 없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듣고 보았습니다. 오래전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버림 받은 것 같은 유대 땅에서 또 한 번 더 버림 받은 세리 마태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부르셨습니다.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마태와 24시간 365일 함께 하셨습니다. 3년간 예수님께 집중 치료를 받으며 마태의 병든 내면을 치유되고 죽어가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그렇겠지만 특별히 마태에게 예수님은 도저히 아무도 함께 할 수 없을 정도 이기심으로 병들었던 나와 함께 해 주신 분이시기에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빼박캔트' '빼도 박도 못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와 함께 하소서라고 절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작년 성탄 전야 예배 때 학생회에서 준비해서 공연했던 연극을 기억하십니까? 그 연극의 제목이 오늘 말씀의 제목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연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돈 만 아는 스크루우지 영감이 꿈속에서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서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요셉과 마리아를 마구간으로 내쫓은 여관 주인이었습니다. 이 꿈을 통해 스크루우지는 탐욕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내용입니다. 분명 함께 하기 부담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하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피하고 멀리합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 많은 인간들과 함께 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마침내 죄의 오물이 흐르고 악취 나는 세상 한 가운데 아들을 한 아기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임마누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은혜를 안다면 이제 우리는 달라져야 합니다. 함께 하기 부담스러운 사람, 함께 하기 싫은 사람과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통해서 세상은 임마누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성탄 시즌에는 이렇게 그동안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함으로 의미 있고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4절과 25절을 보십시오. 잠에서 깬 요셉은 무엇을 했습니까? '천사의 말은 너무 부담스러워' 하면서 무시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분대로 행했습니다. 아내 마리아를 데려왔고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첫아들을 낳은 후에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주목합니다. 반면에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에 주목합니다. 마리아도 훌륭하지만 요셉도 참 훌륭하고 배울 점이 많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사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현재 신분은 갈릴리 나사렛의 천한 목수였지만 역시 그의 피에는 다윗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나 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속 역사의 절정에 올라가는 그 지점에서 아주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아직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이 땅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천사들이 생명책에 그 이름을 적어놓음으로 족보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김해현 목자님이 김기드온 목자님을 낳고 김기드온 목자님이 OOO를 낳고" 이제 OOO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누군가의 이름을 채워 넣을 때입니다. 우리가 현재 자리에서 요셉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낳고 또 낳는 생명 구원의 역사 가운데 다만 은혜로, 믿음으로 쓰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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