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유기성목사의 영성일기의 이원론적인 영성의 문제점들 본문

신학/실천신학

유기성목사의 영성일기의 이원론적인 영성의 문제점들

이창무 2017.01.21 16:28

다음 글은 허성식 교수님이 유기성목사의 영성일기의 이원론적인 영성의 문제점들을 지적하신 내용입니다.

평소 유기성 목사님의 페북글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공감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것은 아닌데 하던 분을 잘 정리해 주셨습니다.



“유기성목사의 최근의 칼럼들에 나타난 이원론적인 영성의 문제점들- 소통, 신학 그리고 실천의 삼중적 부재” 

(The Problems of Dualistic Spirituality in the Rev. Kee-sung Yoo’s Recent Face-Book Postings: the Three-fold Absence of Communication, Theology, and Practice) 

(* 이 글은 뉴스앤조이에 올린 본인의 글에 대해 유기성 목사님께서 반론을 제기하면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셨기에, 그 질문들을 중심으로 재반론을 하는 성격의 글입니다. 유기성 목사님께서 칼럼에서 저를 허성식교수라고 지칭하셨기에 저도 본 글에서는 일반적인 글쓰기 방법에 따라 목사님을 ‘목사’라고 칭하였다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1. 들어가는 말

        먼저 이번 논쟁의 발단은 사실 지난 주부터 시작된 현 대통령과 그녀의 주변에 있었던 실제적인 비선의 권력층의 실체가 드러나면 촉발되었던 현 대통령과 그녀와 함께 했던 패역하고 사악한 무리들에 대해 전 국민적인 심판의 목소리를 힘을 더해가고 있는 가운데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런 시국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오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특별히 유기성목사가 자신의 페이스북의 칼럼과 뉴스엔죠이와 한 전화 인터뷰 내용이 알려지면서 논쟁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본인이 유기성 목사의 영성일기 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쓰게 된 것은 사실은 처음에는 현 시국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었다. 비판하는 글을 쓸 때만 해도 뉴스엔죠이에 유목사의 인터뷰가 실린 것도 알지 못한 상태였고, 구체적으로 현 시국에 대해서 유 목사가 칼럼을 통해 어떤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던 때도 아니었다. 그저 신앙적, 신학적, 목회적인 차원에서 영성일기 운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문제점들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이 운동이 보다 건전하고 통전적인 방향으로 나가길 희망하는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기고문에서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영성일기 쓰기라는 영성 훈련 자체에 대해 비판한 것이 아니라, 유기성 스타일의 영성일기 쓰기를 통한 영성 함양, 즉, 24시간 주님 바라보기라는 영성 훈련이 잘못 지도되었을 때 가져올 수 있는 신앙의 이원론적인 문제들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촉구했던 것이다. 더불어서 이런 영성훈련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확산시키려는 유목사의 활동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전달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의 글이 페이스북에 10월 27일에 처음 포스팅 되고 다음으로 뉴스엔죠이에 10월 29일에 기고되었을 때는 필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일부 페친들 사이에서는 과열되는 양상도 보였다. 그런데 사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근본적인 원인은 필자의 기고문 때문이라기보다는, 유목사가 칼럼을 통해 암시적으로나 적극적으로 본인이 추구하는 영성운동과 영성일기의 방향성에 대해 분명하게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난 주부터 일어난 최순실 사태에 대해 유목사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의견을 칼럼에서 말하고 나서부터 더욱 치열한 논쟁의 기류가 형성되었고, 더불어서 유목사 스타일의 영성운동에 대해 격하게 반대하는 비판적 흐름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글이 뉴스엔죠이에 기재되면서 이런 논쟁에 불을 붙게 된 것은 사실이다. 본인은 그 글에서 유목사의 영성운동이 가지는 이원론적 신앙 양태의 위험성을 지적했고, 더불어서 이런 운동을 프로그램화하거나 확산하기 위해 각종 세미나나 책 발간 같은 일들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의견도 개진 한 바 있다.  

      유목사가 페이스북의 칼럼을 통해 필자가 기고한 비판적 글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올리면서 봇물 터지듯이 영성일기 쓰기를 통한 영성운동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는 여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글들이 유목사의 페이스북에 포스팅 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현상은 정확히 얘기하면 필자의 글이 뉴죠에 실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글이 뉴죠를 통해 인터넷에 올려진 10월 29일 (토)에 유기성 목사가 그 글을 읽고 같은 날 저녁 자신의 페이스북 칼럼에 해명 및 반론이 글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 날은 수많은 국민들이 청계광장과 광화문에 모여 악한 정사와 권세를 휘두르는 현 대통령과 정권실세들의 퇴진을 외쳤던 날이었고 본인도 이런 외침에 동참했던 날이기도 했다. 본인은 그 날 늦은 밤에 집에 돌아와 유기성목사가 올린 칼럼을 읽었는데, 우선 읽으면서 너무나 당황했고 충격을 받았고, 크게 실망했으며, 무엇보다 걱정이 앞서게 되었다. 당시 나는 유목사께서 페이스북이 아닌 뉴죠에 공개적으로 저의 글에 대해 반박 글을 올리셨으면 좋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어쩠든 유목사께서 이 반박하는 칼럼을 올리면서 공개적으로 본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고, 그 질문들에 대해 답해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에 이 글을 통해 그 요청에 응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요청에 대한 대답이라는 측면과 더불어서, 최근 몇 일 동안 유목사가 계속 그의 칼럼을 통해 자신의 심정과 입장 그리고 생각들을 계속 표명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더 유목사의 영성운동에 대해 좀더 심층적인 신학적인 검토와 평가를 해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본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신학적 검토 이전에 현재까지 페이스북을 통해 나타난 유기성목사의 영성운동의 지향점에 대한 평가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유기성목사가 이끄는 영성훈련의 방향성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들 

     우선 지난 10월 29일부터 오늘 11월 2일까지 유기성목사의 영성일기 운동에 관한 페북에서의 논쟁들 가운데 나타난 의견들을 종합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말 그대로 페북이라는 온라인 토론 장을 통한 갑론을박의 양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런 열띤 논쟁과 댓 글들 가운데 몇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이번 논쟁과 관련해서는 세 가지 다른 입장을 보인 그룹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먼저, 유기성 목사를 찬성하는 그룹, 그 다음은 반대하는 그룹, 마지막은 서로 논쟁하지 말고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그냥 사이 좋게 지내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룹이다. 

      먼저 찬성하는 그룹들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특이한 것은 아직까지 신학자로서 유기성목사가 칼럼을 통해 표출한 영성 훈련의 방향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찬성을 표한 경우가 없어 보인다. 즉 어떤 신학자도 유기성목사가 그의 칼럼을 통해 보여준 일기쓰기를 통한 주님 24 시간 바라보기 영성 훈련과 이런 영성 훈련이 현재 우리가 처한 비상시국에서 어떤 실제적이고 실천적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 그가  칼럼에서 밝히고 있는 현 시국에 대한 신학적 인식과 이해, 그리고 구체적인 방향제시에 대해서 찬성하는 신학자가 페북 상에서는 잘 안 보이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유기성목사에게는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일반 교인들과 또 목회자들이 있다. 이 그룹은 연령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주로 댓 글은 간단한 “아멘”이나 일방적으로 목사님을 지지한다는 식의 글들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댓 글을 통해 보면 이 그룹은 대체적으로 곤경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유목사를 계속 위로하고 격려하고 응원을 보내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 같다. 목회자들 중에서도 유목사의 영성일기 쓰기 운동을 통해서 도움을 받은 분들이 많아 보인다. 이런 분들도 평신도 그룹과 더불어 유목사를 적극 옹호하면서 그룹들을 향해 이런저런 불평과 원망, 그리고 야유를 보낸다. 이들의 규탄 내용은 한 마디로 이런 것이다. “왜 인격적으로 훌륭할 뿐 아니라 온갖 스캔들을 일으키는 목사들과는 차별되는 군계일학 같은 유목사님을 헐 뜯으려 하는가? 한국교회에서 이만한 분이 어디 있는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냐? 영성일기 써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비판하고 성토할 일이냐 말이다. 대답 좀 해보세요.” 뭐 이런 심정들인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유기성목사의 영성운동이 지향하는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반대 하는 그룹들을 살펴보자. 이 그룹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그룹은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신학자들이다. 먼저, 우선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인데, 본인은 레슬리 뉴비긴과 선교적 교회를 연구하는 선교학자로서 유기성목사의 영성지도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들을 10월 29일 뉴스엔죠이에 올린 글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다음은, 유기성목사가 특정 성경 본문 해석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의 구약학자인 김근주 교수가 있다. 다음은 미국 UCLA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회역사가인 옥성득 교수가 유기성목사의 몰역사적 영성 지도를 아주 우회적으로 책망하면서 권면하는 글을 올렸는데, 오늘은 페이스북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유목사의 24시간 주님 바라보기 영성 지도를 때에 맞지 않는 유아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감신대 은퇴교수이고 기독교윤리학자인 박충구 교수가 유목사의 영성운동에 대해 “메스꺼운 영성”이라 평하면서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최근에 귀국한 C.S루이스 연구가이면서 영성신학자인 이종태 교수는 짧지만 의미심장하게 “우리가 24시간 막 바라보면 바라봐지는 그런 신은 죽었다. 진짜 '영성'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대단히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저런 비판적인 댓 글들을 올렸다.  자신의 경험, 성경 이해, 역사 이해, 그리고 현 시국에 대한 여러 가지 좋은 생각들을 피력하면서 유목사의 영성운동이 지향하는 주님만 바라봐야 한다는 식의 영성과 일기쓰기에 대해 진짜 아주 다양한 비판의 글들을 올렸다. 개인적으로는 목회자들이 올린 이런 댓 글들만 자세히 읽고 주님 앞에서 경청해도 우리는 이 시대에 주님이 뭘 하기 원하시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건전한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이 많다는 사실이 한국교회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새물결출판사를 운영하는 김요한 목사가 이런 비판의 글들을 종합해서 “24시간 주님 바라보기” 영성이 가지는 신학적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잘 정리해서 비판하면서 바른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제시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비판하는 그룹에는 젊은 청년층이나 젊은 장년층으로 보이는 그룹도 보인다. 현재 한국에서 현 정권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적인 세대인데, 이 그룹에 속한 분들은 유목사의 영성 지도 방향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목소리를 댓 글을 통해 피력하고 쏟아내고 있었다. 

       한편, 이번 논쟁에는 소수이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세 번째 그룹인   중도 내지는 중재 파에 속한 사람들도 있다. 유목사의 영성운동, 구체적으로 영성일기 쓰기와 24시간 주님 바라보는 영성 훈련을 지지하는 그룹과 이런 운동이 가지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비판하는 그룹 모두에게 뭐 이런 사소한 일로 서로 논쟁하는가 권면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우리끼리 싸워서 되겠냐는 말씀이다. 두 그룹이 서로 각자 받은 은사대로, 기도할 사람은 기도하고, 현장에 나가 실천적으로 움직일 사람은 움직이면 그만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논쟁의 성격상 이런 분들은 다른 두 그룹에 비해 영향력이 현저히 약하다. 기도하고 행동하는 것 두 가지가 중요하고 두 가지를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큰 견해 차, 입장의 차이, 신학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는 과연 극복되거나 화해할 수 있는 것일까? 필자가 내린 답은 “불가능하다”이다. 왜 불가능할까? 그것은 이 두 그룹은 논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 차이가 단순한 표현 방법이나 신앙적인 색깔, 영성의 색깔의 차이가 아님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유목사의 영성 지도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신학적 점검과 평가를 해야겠다는 느끼게 된 동기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의 논쟁점은 그리스도인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영성, 더 나아가 목회적 차원에서 어떤 목회를 할 것인가와 관련된 아주 본질적을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필자는 이번 논쟁을 통해 한국교회가 보다 바른 영성, 바른 신앙과 신학, 그리고 바른 교회로 나아가는 중요한 한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이번 장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먼저 유기성목사가 이끄는 영성 훈련에 대해서 예전에는 호감을 가지는 그룹이 일방적으로 많았으나 지금은 호감을 가지는 그룹 못지 않게 비호감 내지는 거부감을 보이는 그룹이 생겼고 이 그룹이 점점 커져가는 양상이다. 특히 신학자 그룹이나 목회자들 그룹, 특히 사회변혁에 관심을 두는 목회자들 가운데 유기성목사 스타일의 영성지도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런 반대하는 그룹들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청년이나 젊은 세대 또한 이런 유기성 스타일의 영성지도에 대해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어쩌면 이전까지 유기성목사를 일방적으로 따르던 많은 무리들 중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기성목사를 지지하는 그룹은 일단 그의 페이스북 칼럼을 팔로우 하는 7만이 넘는 사람들 중 다수 일 것이고, 그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그를 지지하는 그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본다. 그런데 요사이 이 그룹은 전체적으로 자신들이 전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따르는 영성지도의 그루(guru)처럼 떠받들던 유기성목사가 이번 논쟁을 통해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는 상황에서 결사적으로 유목사를 방어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이런 모습이 결국 결과적으로 유목사의 영성지도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더 분명하게 노출시키고 잇다는 점을 그들은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유목사와 그를 좋아하고 따는 그룹은 요즘 분노 조절이 안 되어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목사에 대해 비판의 글을 올린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그리고 평신도들과 젊은이들의 절대 다수는 유목사를 미워서, 그를 시기해서, 그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이런 비판의 대열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점이 유목사와 유목사를 추종하는 대중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진실이다. 왜 이런 진실을 읽지 목하고 보지 못하는 것일까? 

필자가 크게 우려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기성목사를 비판하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글을 유목사를 지지하는 측에 속하는 대다수의 평신도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신학자들은 각자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비판할 수밖에 없다. 필자와 같은 선교학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곧 “선교라는 소명”을 가지고, 김근주 교수와 같은 성서신학자는 성경 해석을 가지고, 옥성득 교수 같은 역사학자는 역사적인 인식을 가지고, 박충구 교수와 같은 기독교윤리학자는 신앙인의 존재와 행함의 일치라는 신학과 신앙, 영성의 통전성(integrity)을 가지고, 이종태 교수 같은 영성신학자는 영성지도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비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각도의 신학적인 비판 내용을 일반 평신도들, 특히 오로지 영성일기 쓰는 훈련만을 통해 영성지도를 받고 있는 일반 성도들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물론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신학적인 깊이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분들은 이런 신학적 비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이지도 모르면서 횡설수설하는 말을 댓 글에 늘어놓는 경우들도 다반사이다. 실제로 이번 논쟁 가운데서 유기성목사의 페이스북 상에 올라와 있는 댓 글들을 살펴보면, 과연 유목사를 옹호하는 분들이 비판하는 분들의 글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이 드는 경우가 많았다. 즉, 비판하는 그룹과 찬성하는 그룹 사이에 원활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화가 헛돌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한다. 그런데 이런 불통의 문제는 주로 찬성하는 그룹에 속한 분들에게서 발생하고 있다고 본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 필자는 유기성목사가 지난 10월 29일이후 현재까지 쓴 페이스 칼럼을 중심으로 그의 영성신학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인 입장이 초래한 세 가지 부재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즉, 소통의 부재, 신학의 부재, 실천의 부재이다. 이 세 가지 부재로 인해서 그의 영성훈련은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왜곡된 영성을 함양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음을 논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이번 글에서 필자가 지적하는 유목사 스타일의 영성 훈련이 가지는 문제의 핵심이다. 자 그러면 이제 이 삼중부재(the three-fold absence)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그의 칼럼을 가지고 살펴보도록 하겠다. 일반 성도들, 특히 유목사를 지지하는 분들의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사족을 달면, 여기서 말하는 “부재”(absence)는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저하게 결여되어 있다.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필자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유목사의 최근 페이스북 칼럼 내용이다. 그러니, 필자는 유기성 목사의 영성 전체에 이런 부재를 발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번 글의 범위를 넘어가는 질문이다. 앞으로 누가군 유기성 목사의 영성지도 전체에 대해 신학적인 검토와 평가를 해주면 좋겠다. 자 그러면 이번 글이 점검 대상으로 삼은 최근 유기성목사의 칼럼 내용에 초점을 두고 유기성목사의 칼럼에 나타난 이원론적인 영성 함양의 문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3. 유기성목사의 이원론적 영성 함양의 문제에 대한 비판- “삼중적 부재: 소통의 부재, 신학의 부재, 실천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영성의 왜곡”

여기서 우리는 논쟁의 초점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다시 한번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는 사실이 있다. 이번 논쟁에 참여하면서 유기성목사의 영성지도 방향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적 의견을 개진했던 분들의 공통적인 내용은 “영성일기 쓰는 훈련” 자체에 대해 비판한 것이 아니었다. 영성일기를 가지고 왈가불가한 분들은 제 기억으로는 한 사람도 없었다. 비판하는 글들을 보면 대부분 “영성일기” 자체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필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유기성목사를 지지하는 그룹에서 유목사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이런 저런 댓 글을 달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열을 올리면서 하는 얘기는 많은 경우 이런 것이었다. 즉, “왜 영성일기 쓰자는데, 왜 기도하자는데, 왜 주님을 하루 종일 바라보자는데.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라는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은 사실 유기성목사 자신이 지금까지 그의 칼럼에서 표출했던 반응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서 필자가 지적하려고 하는 유기성목사의 영성지도가 가지고 있는 삼중부재(three-fold absence)라는 문제 중 첫 번째 문제가 드러난다 생각한다. 

즉, 필자가 지적하는 첫 번째 문제는 “소통의 부재”(absence of communication)이다. 유기성목사의 최근 칼럼들을 읽어보면, 필자의 뉴죠 글이 나간 이후 유목사가 쓴 10월 29일 저녁 칼럼과 그 칼럼에 대한 비판하는 그룹의 반응, 그리고 나서 유목사가 다시 계속되는 칼럼을 통해 비판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영성지도자로서 현 시국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신학적 견해들을 밝히고 있는데, 문제는 유목사를 비판하는 그룹들의 비판의 강도가 갈수록 더 격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목사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기대에 대한 포기와 실망, 그리고 그의 신학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부호가 계속 더해져 가는 양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점증하는 비판들을 직면하면서 보여주는 유목사의 신학적 인식과 이해 수준은 그의 칼럼을 읽고 있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을 좌절하게 만들고 있다. 애석하게도 그에 대한 실망은 애꿎게도 그와 같이 메가처치 (보통 2천명이상 출석 교인인 교회 지칭)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수준도 아마 그러리라는 짐작을 하게 만들면서 한국교회 대형교회 목회자들의 수준을 전체적으로 폄하시키는 계기가 되어버렸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의 칼럼들을 통해서 그가 소통을 제대로 하지 않는 목회자임을 거듭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전반적은 그를 반대하는 그룹에 속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 청년들이 지적하는 그의 문제는 “유체이탈식” “동문서답식”의 그의 글 쓰기이다. 도대체가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들으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이 든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유목사는 뉴죠에 올린 필자의 글을 읽고는 정말 글이 올라 온지 몇 시간도 안된 지난 토요일 저녁 반박하는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 칼럼에 올렸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서 필자가 유목사의 영성일기를 병적인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적했다. 정말 필자가 그렇게 얘기했는가? 아니다. 유목사가 제 글을 잘못 읽은 것이다. 왜 잘못 읽었을까? 너무나 흥분하고 분했던 것 같다. 본인이 올렸던 글에는 영성일기 자체를 비판하고 그것을 병적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성일기 쓰는 것이 요즘같이 심령이 메말라가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익한 점이 많다고 분명히 밝혔다. 필자가 병적이라고 지적한 것은 작금의 한국의 상황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인 책무에 대해 분명한 고민과 묵상과 실천이 수반된 어떤 메시지를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목사의 칼럼들이 반복적으로 영성일기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있음에 대해서, 이렇게 영성일기에만 매달리시는 것은 "중독"에 준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즉, 영성일기 자체를 병적이라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유목사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글을 찬찬히 읽고, 묵상하고,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자신을 무조건 반대한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분을 가지고 읽는 듯 하다. 그러니 소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목사가 저에 대해 반박을 하면서 올린 칼럼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영성일기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읽고. 뉴스엔죠이에 허성식교수의 [영성일기에 대한 비판]의 글이 올라서 읽어 보았습니다. 영성일기에 대한 토론에 대하여 환영합니다. 그것은 영성일기가 건강한 열매를 맺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비판하는 사람들이 왜 비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영성일기에 대해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영성일기쓰기 운동이 가지고 있는 “방향성” 즉, 유목사가 그 운동을 이끌어가는 “지도 방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판한 것이었다. 또한 영성일기가 건강한 열매를 맺으라고 지금 비판하는 사람들이 귀한 시간 내어서 글을 올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우리는 영성일기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좋은 훈련일 것이고 필요한 사람들은 하면 된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이 일기 쓰는 것을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특히 현재의 시점에서 그 운동 지도하고 있는 유목사의 지도 방식이 가지는 이원론적인 신앙과 영성 지도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성일기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아니다. 유목사는 영성일기에 매여 있는 것이 확실하다. “중독”이라고 지난번 글에서 표현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전부 영성일기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그의 문제의 핵심은 소통의 부재로 보여진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문제는 그의 자의적인 성경 읽기와 성경 구절 의존형 신앙고백과 영성지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심각성이 더하다 생각한다. 누가 그가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을 모를까? 누가 그런 구절들의 신앙적 의미를 모를까? 그는 마치 새가족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 기초반에 모인 성도들을 훈육하듯이 우리에게 (필자에게) 이런저런 성경구절을 제시하면서 힐문하고 대답해보라고 추궁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허교수는 왜 주님만 바라보자는 내 진실된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는가?”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참 유치하다. 그가 어제 “분노”에 관해 쓴 칼럼에서도 그는 여러 성경구절들을 동원했는데, 이런 성경 구절 인용은 자의적 성구 선별이라는 아주 안 좋은 모습일 뿐 아니라, 그 해석과 적용을 보면 경악을 금치 못활 정도이다.

 따라서 필자는 근본적으로 유기성목사의 성경 읽는 법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성경과 소통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성경을 바로 읽고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소통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 가르치심이 필요하다. 성경은 다양한 역사적인 배경들을 가지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성경이 현재 우리가 처한 새로운 역사적 환경 속에서 “진리”로서 읽히고 해석되기 위해서는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한다. 그러면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눈을 열어 우리가 처한 이런 역사적 환경 속에서, 즉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도록 도와주실까?

 성령은 단순히 성경만을 우리에게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성경 속의 역사, 그리고 사도행전 이후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해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여기서, 유기성목사의 성경 읽기의 근본적인 약점이 드러난다. 즉, 성경만 읽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그의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 잘못된 보수신앙이고, 잘못된 경건이며, 잘못된 영성이다. 성경은 성경만 읽어서는 절대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성경만 읽으면 성경은 일개 사람들이 편집한 문서로 판명되고 자유주의신학자들의 공격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책으로 전락하게 된다. 성경은 성경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 그리고 현재의 역사 가운데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진리를 보게 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읽어야 비로서 바르게 해석이 되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과 주님과만 소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 성경과도, 주님과도 제대로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성경도 왜곡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도 무슨 직통계시를 받아야 하는 말씀처럼 무당화(shamanistic) 시킨다. 

즉,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성경 속의 과거 역사와, 사도행전 이후의 역사와 그리고 현재의 역사적 상황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바로 묵상된다는 얘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묵상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묵상은 성경 책 달랑 한 권과 골방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으로는 되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이런 일반적인 경건의 일기 (QT)난 영성일기와는 다른 차원의 묵상을 요구한다. 성경과 골방을 누가 소홀히 하겠는가? 지금 유목사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누가 성경을 그리고 골방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유목사의 영성지도는 이미 소통이 부재한 지도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영성 지도는 필연적으로 독단적이고 교리적인 주장으로 발전하다가 몰락한다. 이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유목사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고 필자는 본다. 유목사를 선의를 가지고 좇는 무리이든 맹목적으로 따르는 무리이든, 혹은 못된 동기로 그러건 (예를 들어, 유목사의 영성일기운동을 통해 돈을 벌어먹으려는 동기. 이 운동을 통해 자기 일자리 하나 만들려는 동기 같은 것 말이다. 영성과 비즈니스가 교묘하게 만나는 자리를 의미한다).

  유목사는 이런 자신에게 아첨하는 말, 칭찬하는 말 하는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소통의 부재 가운데 머물게 될 것이고, 그런 소통의 부재는 결국 하나님 임재의 부재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계속 바라볼 수 있다. 바라보는 것은 자유이니까. 그런데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바라봐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꼴 보시 싫다 하시면서 우리를 쳐다보지 않으시면 어쩔 것인가? 그 때도 계속 주님을 바라볼 것인가? 역사 속에서 현존하시고 지금의 역사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간과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경건한 것으로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참된 경건이고 최고의 영성이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런 영성은 성령의 영성이 아니며, 종교적 영성이고, 심하게 되면 무당적 영성으로 전락하기 십상이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을 홀린 최태민과 최순실은 소위 말하는 직통계시 같은 것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주님의 임재를 바라는 것을 샤머니즘적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유목사가 그런 의도가 없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 세상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골방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무당이 신 내림을 기다리는 것과 본질적으로 무슨 차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믿는 주님이 내 골방에만 관심 가지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란 말인가? 

두 번째는, “신학의 부재” (absence of theology)이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공부인데, 사람은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고,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정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알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부단한 공부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학 공부의 의미이다. 그런데 소통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거의 다 공부하지 않거나, 편향된 공부를 한다. 예전에 신학교 다닐 때 들은 얘기이다. 어떤 영성 운동하는 목사 한 분이, 이 분도 자신의 독특한 영성으로 인해 세상에서 꽤 유명해졌던 분인데 자신의 모교인 신학교 채플 시간에 와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때가 기회다 싶어서 신학박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식으로 엄청 공부 많이 하는 것에 대해서 까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예배 후 은사되시는 어느 교수님 방에 가서 욕 무지하게 얻어먹고 엎드려 뻗쳐(?) 했다는 후문이 돌았다고 한다. 

물론, 필자도 목회 현장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처럼 많은 신학 공부를 할 수도 없고, 어떤 면에서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점에 대해 공감한다. 하지만 목회자는 꾸준하게 목회에 필요한 공부 (신학 공부와 세상 공부)를 계속적으로 수행해야 된다. 그런데 목회자들 가운데는 신학 공부한 사람들은 머리만 크지 실제로 영적이지 않다는 그릇된 편견을 가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특히 소위 책 좀 쓰고 유명한 강사 되고, 그래서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마치 자신이 신학적인 면에서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진 분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런 목회자들은 자신에 대해 너무 자신만만 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정말로 계속 해야 하는 공부를 게을리 한다. 공부를 하지 않고 계속 사역만 하니까 자신을 세상 가운데서 보는 능력이 점점 더 줄어들고 좁아진다. 그런데 이런 세상을 보는 시각이 좁아지는 현상은 사역의 규모가 큰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목양이 아니라 비즈니스 같은 목회, 정신 없이 프로그램 돌리는 일에 집중하고, 프로그램 안 돌리면 유명세에 걸맞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집회 인도하기 바빠져서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상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면서 어떻게 주님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주님만 바라보자고 외치는 유목사의 주장은 뭔가가 이상하다. 

그래서 일까? 어제 유기성 목사가 올린 칼럼은 그가 과연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하게 만든다. 어제 칼럼에서 그가 솔직하게 밝히고 있듯이 그는 지난 주말부터 지금까지 심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으면서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 분노 가운데서 그는 분노를 처리하는 방법을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더욱 강화하는 방법에서 다시 찾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모습이다. 그러면서 그가 주장하는 얘기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다. 자신은 분노가 올라올 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바라보면 잠잠히 있으면 분노가 가라앉는다. 그렇게 분노가 가라 앉지 않으면 글도 쓰지 않고 아무 일도 안 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칼럼에서 이렇게 분노를 조절하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 바로 십자가 영성이고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인의 비움의 영성이라고 주장하는 듯 얘기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그 다음이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다. 그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겠다.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십자가 지지는 않으면서 분노만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옳다고 느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며칠 전 마음의 분노로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로 갑니다. 아니 주님께로 가야합니다. 그 길 밖에 없음을  수도 없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의사표현도 해야 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겠지만 분노의 영으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바로잡으려 할 때, 꼭 분노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 (중략)…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죄를 짓는 것도 두렵지만 분노를 품는 것도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아무 일도 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유목사의 어제의 칼럼, “분노가 마음에 있을 때”에는 너무나 많은 신학적, 신앙적, 목회적, 영성적, 선교적, 실천적 오류들이 가득하다. 이 글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든다. 우선 지금 그는 자신이 분노가 많은 사람임을 시인하고 있다. 이건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의 진짜 문제는 자신의 이 분노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하루 전인 11월 1일 칼럼에서 자신의 칼럼에 많은 댓 글이 달리는데 상당 부분이 비난성 댓 글이라고 적고 있다. 필자는 그가 현재 분노하는 원인이 바로 그의 사역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본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것으로 인해 분노하고 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악하고 패역한 무리들이 벌인 일들에 대한 분노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의 내면에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세상의 불의에 대해 뉴스를 보면서 느끼는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서 뒤엉키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필자는 유목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두 갈래의 분노의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직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본인이 혹시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 분노하고 있지 않다면 좋다. 후자의 분노에 대해서 주님께 물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 두 분노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전에서 절대로 본인의 주장처럼 칼럼 같은 거 쓰지 말고, 제발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생각해서라도 잠잠히 주님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이런 그의 분노에 대해 직통계시로 그에게 말씀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점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순실 같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기성 목사가 추구하는 영성의 치명적인 약점, 곧 “소통의 부재”가 확실하게 드러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유목사는 주님만 바라본다고 주장하고, 주님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정작 그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는 것 같다. 필자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골방에서만 말씀하신다 믿지 않는다. 주님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많은 경우 말씀하시고, 어떤 상황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유목사가 왜 분노하고 있으며, 왜 그 분노를 어제의 칼럼에서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고 해석했을까? 필자는 그가 신학과 세상 공부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성경만 보고 주님만 바라보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쉬운 경건 서적들만 읽고, 그리고는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 특히 악한 일들과, 하나님 나라를 이런 세상 가운데서 보이기 위해 고민하면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쓴 책들은 가까이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의심이 든다.

쉬운 책들만 골라 읽는데 익숙하다 보니, 자신의 책도 쉽게 쓰고 쉽게 출판하는 것 아닐까? 페이스북에 올린 글들 모아 쉽게 책 만들어 팔고, 영성일기 가지고 책 만들어 팔고, 그런 책들이 베스트셀러 되어 명성과 부, 인기를 얻고, 그래서 코스타 같은 곳에서 단골 인기 강사 되고, 그래서 큰 무리가 따르는 구루(guru)가 되고 (서양에서는 이렇게 어떤 운동을 확산해서 많은 추종자를 가진 사람들을 구루라 부른다), 과연 이런 삶이 영성일기를 쓰는 열매인가? 필자는 유목사가 개인적으로 이렇게 모은 부로 어떻게, 얼마나 선행을 했는지 별 관심이 없다. 유목사를 추종하는 한 페친이 필자에게 댓 글을 쓰면서 이렇게 비난했다. “유명한 목사님 공격해서 당신이 유명세 타려 하는 것 아닌가? 연예인들이 하는 하는 식으로.” 허허 댓 글 다는 수준이라고는 어이상실이었다. 필자는 영성일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의 탁월한 프로그램으로 홍보하고 책 만들어 팔고, 세미나 하고, 강의 하고 이런 것 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골방 기도와 이런 마케팅, 비즈니스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정말 메스꺼운 영성 아닌가?  

나는 이런 세상적인 명성과 쉽게 돈 버는 일에 관심 없다. 주님이 명성을 주시면 받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무명한 자처럼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싶다. 주님이 돈 주시면 감사하다. 그러나 쉽게 돈 벌고 싶지는 않다. 오래 시간 다른 사람들의 책을 읽고, 고민하고, 연구하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고, 이 세상과 씨름하고 그런 가운데 써야 할 책이 생각나면 그 때 나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쓰고 싶다. 나는 유기성 목사가 개인적으로 어떤 은밀한 선행을 얼마나 했는지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가지시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이다. 유목사를 추종하는 그룹에는 종종 이런 댓 글들이 발견된다. “여기 비판하는 목사들, 신학자들, 당신들이 우리 목사님보다 존경 받을만한 삶을 살기나 해? 그렇게 살면서 비판해라. 가까이서 오래 지켜보았는데 얼마나 인격적이고 어려운 사람들 음으로 양으로 돕고 하는데.” 그런데 그런 식으로 유목사를 몰상식하게 존경하는 분들은 아셔야 할 것이 있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목회자들이 유목사처럼 그런 위치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면 그 정도의 선행을 아마 하지 않을까 말이다. 물론 자기 배만 채우려는 못된 대형교회 목사들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자신과 자기 가족들만 위할 줄 알고 교인들 헌금으로 온갖 사업 벌이면서 “주여, 주여!”를 외치는 먹사 같은 목사들 말이다. 참으로 그런 먹사 같은 목사들에 비하면 유목사는 성인군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유목사를 먹사로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보다 인격적으로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것도 아니다. 아마 오래 영성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분명 여러 면에서 필자보다 그리고 보통의 목회자들보다 인격적으로, 그리고 다른 부분에서도 탁월한 분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분으로 남기를 모두가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한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 바램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목사의 칼럼에 나타난 그의 입장과 신학적인 견해에는  “실천의 부재” (absence of practice)라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삼중부재 중 마지막에 해당한다. 소통에 장애가 있고,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게 되면 당연히 실천을 할 수 있는 힘이 달리게 된다. 그렇기 되니까, 실천이라는 것이 고작 교회중심, 교인중심의 종교적인 활동에 국한되게 되는 것이다. 고작 영성일기 쓰는 훈련에 국한되게 되는 것이다. 고작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옥성득 교수가 시의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에는 “때”가 중요한데 이 때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옥 교수가 페북에 포스팅한 글을 일부 소개한다.

“만사에 때가 있다- 때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게 역사의식이다. 24시간이 다 동질이 아니며 한  가지 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삶도 유아에서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 장년, 노년의 시기를 거친다.  그 때에 맞는 성숙이 없으면 철이 없는 미숙한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5살의 아이가 엄마에게  붙어서 말하는 순진하고 착한 말을 50살 장년이 아직도 하고 있다면 때에 맞지 않다. 부흥, 영성,  경건에서 중요한 것을 때를 분별하는 역사의식이다.” (옥성득, 11월 3일)

유기성 목사의 어제 칼럼은 지금은 분노할 때임에도 분노를 악하게 보는 그릇된 성경 해석과 역사 해석을 하고 있다. 저를 포함한 여러분들의 비판들이 영성일기 쓰는 것 자체를 병적으로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다. 유목사에 대한 비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영성이 반드시 담아내고 있어야 하는 우리를 보내신 바로 그 곳, 현재의 역사적 자리, 우리의 경우는 2016년 11월, 아마도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분명히 기록되고, 한국역사에도 반드시 기록될만한 자리, 즉 현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패역한 무리들로 인한 국정농단와 국기문란 사태의 충격의 자리에서,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떤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성경을 이런 삶의 자리에서 묵상하고 삶 속에서 적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칼럼을 통해 나타난 유목사님의 영성운동 지도는 분명히 우리를 잘못된 길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기성목사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이만열 교수와 박영돈 교수, 그리고 김동호 목사, 김영봉 목사 같은 이들이 페이스북을 통해서, 그리고 담대하게 주일설교에서 탄핵을 언급한 주현신 목사 같은 이들이 현 시국에는 유목사 식으로 가만히 침묵하고 기도만 할 때가 아니다고 소리 높여 외치고 있으며, 지금은 개인적 회개만을 강조해서는 안 됨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 왜 유기성목사는 홀로 분을 삭이면서 골방에서 십자가를 묵상하고 있는 것인가? 골방에서 기도만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기도해야 하는 사람도 있고, 광장으로 거리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유기성목사가 칼럼을 통해 말하는 것은 분명히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과 골방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을 넘어서, 광장으로 나가는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 그리고 거리로 나가는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청년들, 11월 12일에는 아마 온 국민이 거리로 나가야 하는 이 역사적인 때에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바른 방법이 아니며,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닐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가라앉혀야 한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선동”을 하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얘기이다. 

유기성목사는 자신이 지난 10월 29일부터 어제까지의 페이스북 칼럼을 통해서 지극히 편향된 신학적 입장을 표명해오고 있다. 필자는 이런 입장은 “이원론적인 영성의 양태”라고 분명히 지적했고, 이런 문제가 어떤 영성의 왜곡을 가져오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했다. 유목사의 진짜 문제는 다른 비판하는 분들이 지적하듯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의 그 지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독불장군식의 독선적 영성을 오랫동안 계발해 왔다는 점이다. 너무 충격적인 발견인데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그리고 이 또한 하나님의 일이라 믿는다. 필자는 지난 번 글과 이번 글 모두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한국교회에 잘못 확대되고 있는 왜곡된 영성 지도를 바로 잡기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라 믿는다. 필자에게 유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가 보기에 분을 삭이면서) 던졌다. ““교수님은 어떻게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주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히 동행하는 데 어떤 방법이 가장 유익하였습니까?”“어떻게 했을 때 삶의 변화를 체험하셨습니까?” 

답을 드린다. 필자도 학창시절 영성일기 같은 일기 여러 해 써봤다. 그 유익을 알고 있다. 그런데 대학교 4학년때 그만 쓰고 싶더라. 그 때 이후로 쓰고 있지 않다. 지금 필자의 영성일기는 내가 즐겨 사용하는 여백이 있는 성경들의 여백에 기록된 메모이며, 미국에서 10년 넘게 공부하면서 읽었던 수많은 책들 사이사이에 꽂혀 있는 주님이 주신 영감으로 가득한 메모들과 지금도 읽고 있는 수많은 믿음의 동지들이 쓴 책들과의 대화이며, 내가 신학교에서 강의하면서, 그리고 매주 설교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 적으면서 기록한 나의 강의안과 설교노트이며, 내가 사랑하는 딸과 아내와 나누고 있는 매일의 대화이며, 요즘은 페이스북을 통해 과장되지 않고 솔직하게 우리를 서로 돌아보는 대화들이다. 

필자는 요즘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한 동료 목사를 위해 함께 학교를 졸업했던 사랑하는 동기들과 더불어 지난 10월 24일부터 12월 8일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을 연속 체인 금식기도를 하고 있다. 10월 23일 이런 기도를 필자가 제안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동기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암으로 투병 중이기 때문이다. 우리 동기 250여명은 정말 사랑의 공동체로 신학교 생활 재미있게 했는데, 벌써 몇 동기는 주님 품에 갔다. 신학교 재학 중 정말 멋진 동기 전도사님이 주일 설교 중 쓰러져 주님 품에 갔다. 필자는 그 전도사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한다. 얼마 전 우리 동기는 터키인으로 최초로 한국에서 신학교 공부하고 목사 되어서 박사까지 되었던 우리 동기 목사님을 주님께 먼저 보내드려야 했다. 몇 해 암으로 투병했었다.  감사한 것은 이 터키 목사님을 우리는 왜 이렇게 일찍 데려가시는지 몰라서 아파했는데, 하나님이 그 곳의 교회를 더 굳건히 세우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필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어떤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이 우리 앞에 아른거리면서 우리들을 위협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그냥 하루 하루 동행하는 것이다. 그냥 동행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나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필자에게 하라 명하시는 것은 이 글을 쓰는 것이고, 이것이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픈 동료를 위해 기도하고 하루 금식하는 것이다. 이런 금식 기도 중에 지난 주부터 이 땅과 이 나라를 위해 우리는 같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필자는 24시간 주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 보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경험했던 주님이 나에게 원하셨던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나라는 지금 온 백성이 악한 정사와 권세들로 인해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런 위중한 때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뉴비긴의 말로 하면 보여줘야 하고 (sign), 미리 맛 보게 해야 하고 (foretaste), 하나님 나라가 세상가운데 침노하는 도구(instrument)가 되어야 하는 이 마당에 우리가 어찌 골방에만 머물러, 교회 안에만 머물러 맛이 가버린 소금 신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주님은 등경을 테이블 밑에 숨기지 않으시고 테이블 위에 두시면서 온 세상에 우리의 빛을 보게 하라고 명령하시면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로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다. 교회는 본질적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선교적인 공동체”(missional congregation)이다.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우리는 골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골방에만 머물라고 주님이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이 아니다.  

유목사가 필자에게 던진 질문들은 전부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이다. 주님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시는 분이 절대 아니었다. 이민교회 담임목회 6년 동안 한 가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당회에서 기도하면 결정하면서 했던 일들은 주님이 다 들어주셨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귀국한 후 지난 3년 간 주님은 나에게 “어떻게”란 질문이 교회들을 망치고 있음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나에게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시행착오 두려워하지 말고 그냥 네가 나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이라면 이것저것 다 해봐라. 어떤 것을 해야 되냐고 나에게 묻지 말고 주어지는 일을 다 해라.” 

지난 3년의 순종 기간 동안 주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은 한 가지이다. “왜?” 라는 질문만 해라. 이 질문의 연장에서 “왜 영성일기 쓰는 것이 이렇게 이상한 교회내의 분열과 파당, 그리고 현재 한국 상황에 대한 몰역사적 인식을 하게 할 까?” 이 왜라는 질문을 가지고 몇 일 동안 씨름했다. 이 순간 유기성목사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지면서 필자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고자 한다. “왜 유기성 목사님은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왜 유기성 목사님은 신학적으로 편향된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일까요?  왜 유기성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어떻게 했을 때 삶의 변화를 체험하셨습니까?”에 대한 유목사의 질문에 대해서는, “주님이 성령 안에서 주시는 참된 자유, 주님만 함께 노는 기쁨, 이런 자유와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삶. 이런 삶이 저를 변화시켜왔습니다”라고 짧게 답을 드린다. 

4. 나가는 말

필자는 유기성목사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24시간 바라보기를 갈망하는 주님께서 그를 향해 이렇게 권면하실 것 같다. 내 마음에 이런 주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내가 사랑하는 유목사야, 이제는 제발 나를 보지 말고 내가 보라는 것을 먼저 봐라. 그리고 네 안에 있는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먼저 봐라. 네가 왜 분노하는지, 네가 왜 너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 사랑해서 비판해주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지, 그리고 이 나라를 다스리는 악한 정사와 권세들 잡은 자들에 대해서 느끼는 너의 분노에 대해서. 너는 너를 사랑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를 십자가를 지는 심정으로 참아야 된다고 억누르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대해서도 그런 십자가 지는 심정으로 참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말이다. 너는 지금 잘못 분노를 처리하고 있는 거란다. 정직하게 직면해 봐라. 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분한 감정을 억눌러서는 안 되고,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분노를 참아서도 안 된다. 내가 보기에 사람들에 대한 분노는 너의 분노는 네가 힘겹게 구축한 너의 왕국이 무너지는 것 때문에 네가 두려워하는 분노이니 정당하지 못하다. 사실 난 네가 만든 왕국에 대해 진작 말하고 싶었고, 사실 여러 통로로 말했는데, 너는 그 때마다 나에게 와서는 주님만 사랑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더라. 난 나만 바라보는 사람 싫은데. 나만 바라본다는 사람들은 꼭 자기 왕국 만들려고 하더라. 전부 한쪽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이는 왕국 말이다. 나의 왕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지. 행복하게. 너는 너무 항상 인상을 쓰고 뭔가 대단한 영성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야. 나만 바라본다고 하니깐 고맙긴 한데. 나는 네가 다른 사람들과 좀 일기를 통해서 대화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들을 통해서도 대화하면 좋겠다. 일기는 밀실에서 하는 일인데, 잘못하면 정신적으로 박약해진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박약한 사람들에게는 절대 내가 너에게 선물로 준 일기쓰는 일 권하지 말아라. 그들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정신병을 강화시킨다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를 해야 하는데, 너에게 준 방법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리고 네가 요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있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 참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은 네 생각 같다. 나에게 정말 물어본 것 맞니? 내가 성경 가운데 나의 삶을 통해,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사도행전 29장인 교회의 역사 가운데 수많은 허다한 증인들을 통해 너에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이니? 현재 나의 이름을 위해서 나의 종들이 악한 정사와 권세들과 싸우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던지고 있는 거 너 보지 않니? 지금 너의 분노 조절은 잘못된 것이다. 악한 왕국에 대해서 정의를 외쳐야 하는 것이, 골방이 아닌 골고다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너의 말이 잘못된 것이다. 나는 네가 나의 말을 듣고 너의 분노의 정체를 정확히 먼저 보면 좋겠다. 난 사실 네가 나를 24시간 쳐다보지 않아도 너를 사랑하고 아끼고 지켜준단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기울여야 된다. 너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내가 보여주었지 않았니. 나는 무리에게 절대 나를 맡기지 않았다. 무리들은 언제나 나를 왕으로 삼아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지. 영성일기 운동이라는 너의 왕국은 내 뜻이 아니라 너의 뜻임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너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생명책에 자신의 일기를 쓰라고 너는 외쳐야 한다. 거짓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나에게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너를 사랑하는 네 선배 목사가 너의 영성에 대해 메스껍다고 한 말을 감사하게 받고 그분을 형님을 모시고 너의 영성운동의 방향을 재검토해 달라고 겸손히 부탁해라. 다시 한번 내가 말하는데 지금 네가 너를 비난한다고 말하는 그들이 진짜 너를 사랑하는 자들이고, 너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4 Comments
  • 프로필사진 안은자 2018.02.03 07:21 신고 교수님의 글을 읽고 우선은 긴 글이 내용이 없다는 즉 자신의 생각을 마치 신학의 큰 부분의 문제를 드러낸 것처럼 보여 불편하고 자신이 마치 이 세대의 횟불을 든것 처럼 여겨져 불쾌하며 오히려 사단의 사주를 받은 대상자라여겨 가엾으며 얼마의 기도와 주님과 동행을 하며 영성과 영혼에대해 성도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치는가 기가악힙니다 난 유목사와는 전혀 괸계가 없으나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 지도자들 즌 당신과 같은 이에게 바라시는것이 무엇인가는 알겠습디다 기도 합시다 당신의 싸움보다 주님이 하실 싸움이 더 정확하고 크실테니 쯧ㆍ 난 보수도 아니지만 진보도 아닌 독자요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가 2018.03.12 17:36 신고 신학 박사라면 적어도 자신의 신학적 스탠스를 바탕으로 영성일기가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지, 성경 말씀과 어떤 점에서 상충이 되서 반다한든지 식의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신학적 소양이 부족하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인신공격 식의 말씀만 하고 계시네요. 영성일기 신학이 부재하다고 생각된다면 어떤 점에서 어디가 부족하다 언급을 하셔야죠..지지하는 신학 박사가 없다는 것이 반대 논거가 된다니...(그마저도 정성욱 교수가 영성일기에 대해 역사신학적인 스탠스에서 에세이 쓴 것이 있는데...)

    자신도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그러니 영성일기 잘못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이분께서 조롱에 가깝게 비난하는 영성일기의 "추종자"분들 이상도 이하도 아닌거 같습니다.
  • 프로필사진 지나가는 사람 2018.08.14 13:09 신고 읽는 내내.. 주님의 은혜가 아닌, 불쾌감만 자꾸 느네요.
    신학을 1도 공부해보지 않은 저 같은 사람도 분명히 아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글 쓴이는 과연 주님이 주신 마음으로 글을 썼을까....
    지식의 저주.
    읽는 내내 이 말이 마음속에 맴돕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서, 이나라와 내가 속한 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우선되는 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시는 건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저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그 것을 돕기위한 것.. 그것이 주님이 유기성목사님을 향한 사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판단은 주님의 몫이지요. 신학박사님들의 몫이 아니라 생각되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엄청 크신 분이지요.. 각자가 만난 하나님이 전부는 아닐겁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일부분을 만나고 그 영역을 넓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으니, 그 사람이 만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논리에 빠지지 마시고, 모든 사람들을 각기 쓰임대로 다르게 지으신.. 하나님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시길..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길.. 기도드립니다.
  • 프로필사진 에스더 2018.10.06 13:31 신고 죄송합니다만 글은 상당히 긴데 영성일기에 대한 명확한 반박의 근거가 없어서 좀 아쉽습니다. 특히, 마지막 5줄은 쓰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