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요엘

경고의 소리를 들으라

이창무 2015. 5. 1.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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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의 소리를 들으라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요엘 2:1)


지난 주 화요일 고대에서는 큰 사고가 하나 일어났었습니다. 법학관으로 들어가려던 셔틀버스에 한 여학생이 치여서 사망한 사고였습니다. 그 학생은 박반석 목자님의 후배로서 사학과 08 학번이었습니다. 목격자에 따르면 이 학생은 휴대폰을 보면서 가다가 그만 버스를 보지 못하고 모서리 부분에 부딪쳐 쓰러졌다고 합니다. 버스 기사는 학생이 쓰러져 있는 사실을 모른 채 전진하다가 그만 그 학생를 버스로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교내에서 일어난 사망 사고라서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장례식은 고인이 속해 있던 문과대학장으로 치러졌고 김 병철 총장은 해외 출장 중에 비보를 접하고 특별히 애도의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과정을 가만히 보면 참 안타까운 점이 많습니다. 사고 당시 버스는 매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핸드폰을 계속 보면서 걸어 가느라 미처 버스를 보지 못했습니다. 핸드폰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도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아니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그 핸드폰이 스마트폰이었다면 카카오톡을 하고 있었거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가끔 길을 걷다가 문자가 오면 스마트폰을 계속 보면서 걸을 때가 있습니다. 이번 사건 소식을 듣고 나니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 기사 역시 참 안타깝습니다. 처음에 모서리에 부딛쳤을 때 즉시 버스를 멈추었다면 가벼운 교통 사고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쓰러진 학생을 인지하고 못하고 역과해 버린 바람에 끔찍한 사망 사고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버스 기사는 아마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데 설마 누가 여기에 부딛치겠는가 하고 안심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만약 누군가 여학생이 휴대폰을 보고 걷고 있을 때 앞을 조심하라고 경고해 주었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 학생이 쓰러진 즉시 당장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경고해 주었다면 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 경고만 있었다면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당장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번 사고로 죽은 여학생은 이제 겨우 스물네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또 그 버스 기사는 비록 고의는 전혀 없었다 하더라도 자기가 몰던 버스에 한 꽃다운 생명이 죽음을 맞이 했으니 지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코 앞에 위험이 있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모른 채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조그마한 휴대폰 액정 화면에 뜬 문자 메시지를 보느라고 거대한 버스를 보지 못하듯이 삶의 작은 일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느라 정작 큰 재앙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줄을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경고의 소리가 절실합니다. 


오늘 요엘서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날이란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과 인생들을 심판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나오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도 같은 뜻입니다. 승천하셨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그 날이 심판의 날입니다. 그 날에 각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예외 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영생이냐 심판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결정됩니다. 만약 여기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면 그것은 죽음 이후의 죽음이며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재앙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날이 임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먼저 경고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주민들을 다 떨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첫째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중에 별 일 없이 산다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별 일 없이 살아 갈 때 종말에 대한 의식을 갖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건 사고를 만나게 될 때 깨어나서 종말을 대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군복무할 때 저와 늘 함께 사무실에 머리를 맞대고 일을 하던 군수과 선임하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제가 위병소에서 보초 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선임하사가 목에 수건을 둘러 매더니 강에 가서 수영하고 오겠다고 부대를 나섰고 저는 뒷모습을 향해 ‘잘 다녀 오십시오’ 외차며 거수 경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선임하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임진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그만 싸늘한 익사체가 되어 부대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습니다. 저는 그 때 누구든 이렇게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할 수 있고 저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오늘 당장 종말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누더기 같이 너덜너덜한 선행이나 알량한 위선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이 명백했습니다. 예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정결케 되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외에는 어떤 소망도 없음을 그 때 깊이 발견하고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말씀 속에는 종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특히 선지서들을 읽어 보면 거의 대부분이 경고의 말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도 열 처녀 비유 등을 비롯해서 수많은 비유와 말씀들을 통해 종말을 대비하고 깨어 있는 삶에 대한 경고하신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서신서에도 마찬가지이며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종말에 대한 예언이며 경고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대책 없이 사는 우리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나팔 소리입니다. 경고를 잘 듣고 피한 사람은 임박한 재앙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고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점에서 이미 엄청난 행운아들입니다. 아직 주의 날은 이르지 않았지만 언제일지 알 수 없으며 곧 임할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있을 때 그 어떤 심판과 파멸의 쓰나미가 몰려 와도 안전합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지금 복음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로 피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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