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마가복음

열두명의 공동체를 세우신 목적

이창무 2015. 4. 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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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명의 공동체를 세우신 목적


마가복음 3:14, 1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공동체의 구성원 숫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 수는 열둘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열둘이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신 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바로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열두 명의 제자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처럼 새롭게 형성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되는 셈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에 관계 없이 오직 예수님 자신과의 관계성을 통해서 맺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 땅 위에 형성시키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택하신 이 열 둘이란 숫자가 단지 구속 역사의 맥락 속에서 가진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꼭 그렇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열두 명 정도되는 공동체가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가장 잘 수행해낼 수 있는 공동체였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공동체에 두신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14절 하반절과 15절에 나타나 있듯이 세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 즉 예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였습니다. 원어로는 그 유명한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에 해당합니다. 교제가 일어나려면 서로가 서로를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이 일어날 수 있는 최적의 숫자를 12명으로 보신 것 같습니다. 이 숫자에서 많이 벗어나게 되면 실제적으로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중고등학교 때 한 반이 70명 정도였는데 친하게 잘 알고 지내던 급우들의 숫자는 10명 내외였던 것 같습니다. 수가 너무 커지면 인격적인 교제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고, 또 수가 너무 적으면 공동체로서 형성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으면 적은 대로 힘이 없고 다양성이 무너지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이 열두 명의 공동체를 세상 속으로 보내셔서 전도를 하게 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전도는 개인 전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개인 전도를 많이 하셨고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실 때는 그룹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렇지만 개인 전도만으로는 여러 모로 한계가 많습니다. 일대일 관계성도 중요하지만 한 영혼을 구원하기까지는 공동체의 힘이 큰 역할을 감당합니다. 왜냐하면 전도 대상자가 왔을 때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과 연합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수평적 관계 속에서 피어난 동역의 역사가 힘을 발휘하면 그 온기로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세우시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귀신의 힘을 강력합니다. 사탄은 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아 노예화시키고 죄에 지배당한 삶을 살게 만들어 버립니다. 각 개개인의 힘으로 이런 강력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을 제자 공동체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공동체로 모여 서로 합심하여 기도할 때 귀신이 나가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개인 기도를 할 수도 있고 또 해야 하지만 그룹으로 모이는 공동체의 합심 기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열둘 정도 되는 공동체를 세우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교제와 전도와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소그룹 공동체를 세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12명 정도로 구성된 소그룹이 있습니다. 바로 요회입니다. 많은 양들이 요회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생겨났는가를 궁금해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모임 초창기에 수요일에 모이는 소그룹, 목요일에 모이는 소그룹 등이 있었는데 이를 가리켜 수요회, 목요회 등으로 불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후에 소그룹 수가 많아지면서 요일을 나타내는 접두어가 사라지고 대신 요회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보면 요회가 별 의도 없이 우연히 생겨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요회 정도 규모의 소그룹 공동체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준비하셨던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만 이런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적으로는 지역 교회는 구역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CCC에는 순 모임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셀이라고 부릅니다. 또 가정 교회 사역을 하는 곳에서는 목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서로 이름은 각각 다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규모에 비슷한 활동을 하는 소그룹들이 있습니다. 이런 소그룹들이 활성화되어 있는 곳은 예외없이 제자 양성 역사가 잘 이루어지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소그룹이 병들거나 죽으면 개인도 죽고 더 큰 규모의 공동체도 힘을 잃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모임에서 요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각 요회가 예수님께서 뜻 두셨던 대로 교제와 전도와 영적 전쟁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회원들은 다른 요회원들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요회원이 무슨 힘든 일이 있고 무슨 감사 제목과 기도 제목이 있는지를 속속들이 알아야 합니다.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또한 요회는 전도의 중심축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을 새롭게 데려와서 먹이고 사랑해 주고 섬겨주는 전도의 파워스테이션이 되어야 할 곳이 요회입니다. 양들이 와서 요회에서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면 감동을 받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는가 하면서 이런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든 말씀의 힘, 복음의 힘, 예수님의 힘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또한 요회는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합심 기도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요회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드리는 기도를 통해 사탄의 강력한 진이 무너지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승전보가 속속 들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요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본래 목적하신 그런 제자들의 소그룹 공동체의 모습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을까요?

이번 학사 엠티 때 양재규 목자님이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학생 제자 양성 역사는 학생회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회에서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학생회는 요회에서 전도해 온 학생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는 곳이지 학생회에 전도의 사명을 모두 떠 맡길 수 없습니다. 금요 학생 소감 발표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회에서 세운 학생 리더들을 제자 양성하는 모임이 금요 모임입니다. 요회가 정체되면 금요 모임이 정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요회가 활발히 움직이면서 새로운 학생 리더들이 서게 되면 자연스럽게 금요 모임 역시 활발해 질 것입니다. 새벽 기도나 수요 찬양 기도회가 매우 중요하긴 합니다만 모두가 알다시피 늘 나오던 사람이 나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회에서 기도를 할 때는 대부분의 리더들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몇몇 사람이 전체를 살핀다고 해도 요회원이 서로를 알들이 잘 알고 섬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체가 다 모이는 모임은 필요하지만 지체의식을 가지고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요회 단위가 가장 적합합니다. 일대일이 중요하고 전체 모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요회입니다. 각 요회가 살아나야 전도도 살아나고 제자 양성도 살아나고 우리 모임이 건강하고 살아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도 요회 목자를 해 보았기 때문에 요회를 활성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벤처 기업에 다닐 때 너무 바빠서 요회 목자이면서도 여름 수양회 기도 모임에 한 번도 참석을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 낙심이 많이 되었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 요회에서 주일 점심에 식사하고 기도 제목 나누는 정도 밖에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이것마저도 부담스럽게 여기는 분들까지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힘든 것만 생각하면 사실 한도 끝도 없이 계속 힘든 생각이 들고 결론은 그럼 아무 것도 하지 말자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가 부족하고 힘들고 어렵지만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께서 본래 세우고자 하셨던 제자들의 공동체에 조금씩이라도 더 접근해 가려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한 때 저는 제가 섬기던 요회에서 매주 주일마다 미니 수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주일 점심 식사를 한 후에 그 자리에서 그날 들은 말씀으로 소감을 썼습니다. 그리고 소감 발표를 하고 기도 제목을 나눈 후 기도하고 요회 모임을 마쳤습니다. 적어도 이렇게 하니까 소감을 쓰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또 말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할 때 쓰니까 잘 써지고 일찍 소감을 쓰고 나니 마음도 가벼워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제 특별히 봄 학기를 시작하면서 예수님께서 목적으로 삼으셨던 세 가지 중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는 말씀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요회 단위의 교제나 기도는 어느 정도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지만 요회 단위의 전도 역사를 이루는 경우가 안타깝게도 희귀해 진 것 같습니다. 양을 피싱하고 심방하고 섬기는 일들이 요회 단위로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전체적으로 알아서 하겠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하겠지… 이렇게 자꾸 한 발 두 발 발을 빼다 보면 예수님의 제자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학사 엠티 때 세미나 했던 대로 그라운드에서 뛰지는 않고 관중석에서 환호만 질러대는 팬들만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제자들의 모임이 되고 제자를 낳고 키우는 모임이 되려면 요회 역사를 위해 많은 기도와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둘의 공동체를 세우셨던 그 목적 , 교제와 전도와 영적 전쟁을 위한 제자 공동체로서 요회가 굳게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새 봄 학기 요회를 통한 전도 역사가 흥황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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