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성경신학

고든 피 박사가 말하는 바울과 성령

이창무 2015. 6. 2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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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의 예배가 과연 성경적인가?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우. . .”소리를 내면서 예배를 드리는 오순절식인가, 아니면 질서정연하고 점잖게 예배를 드리는 보수적인 방법인가?

이러한 논란은 최근 관심의 표적이 된 '토론토 블레싱'을 한편에서는 지지하고 다른 편에서는 부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인가? 이에 대해 고든 피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사역을 대변하며,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고든 피는 은사주의자들이나 비은사주의자들이나 모두 성령의 오심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길들여서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비효과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으므로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삶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다음은 그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사도 바울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고, 주석을 집필한 바에 의하면 나는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허다한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면들도 상태가 나빠졌다.

성령의 오심의 중요한 측면은 (지역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내세의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천국이 현세에 침노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침노’를 구체화 하는 기관이다. 이 말은 교회가 너무나 천국 중심이 되어 지상의 일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령이 침노하여 교회는 내세의 능력으로 무장되고, 교회의 구속이 인쳐지고 보증되었으며,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유하였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제 천국의 백성처럼 살아야 한다.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신자는 말세를 만난 사람들이다(고전 10:1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통해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구원 및 교회에 대해 현재형과 미래형을 섞어서 말한다. 우리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엡 2:8), 지금 구원을 받아가고 있으며(고전 1:8),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 5:9).

이처럼 교회는 천국과 타락한 지상의 두 가지 갈등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갈등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천국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많은 경우 잘못된 동기로 인해?모든 것을 너무 빨리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부도덕하고(고전 5장),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었다(고전 7장).

 

그러나 지상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자들의 삶은 천국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살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이 교회가 지상 쪽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법정에 호소했다(고전 6장).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한 것이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든 비은사주의자든 내세의 능력에 의해 지배 받는 천국의 삶을 사는 신자들이 드물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천국의 삶이 아니라 지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고든 피 교수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이렇게 타락하게 된 근본적이 원인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성령의 오심의 핵심은 무엇인가? 

 

첫째,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되었다. 성막이나 성전에 임하시던 성령이 이제는 교회나 신자들 속에 임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신이 어떤 신분에 있는지를 망각한 것 같다. 이저에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에 임했을 때 제사장들은 서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정도였다(왕상 8;10).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 얼굴을 감추어야 했다(출 3:6).

이전에는 예배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로 두렵게 하고 놀랍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두렵게 하고 놀랍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

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외경심과 함께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절감해야 하며 동시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으로 넘쳐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기쁨은 있지만 외경심이 부족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외경심은 있지만 기쁨이 없다. 천국과 지상의 삶을 사는 신자들은 외경심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둘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통상적이고 비통상적인 두 가지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고전 12장).

또한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들은 역경과 환난을 이기는 능력을 얻는다(고전 1:11). 즉 신자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빌 2장), 동시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갈 5장).

신약이 말하는 신자들은 성령으로 인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며, 또한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져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단지 추상적인 어떤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다.

성령은 능력을 받은 교회의 신자들을 통해 통상적이고 비통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상적인 사역은 물론 기사와 이적 같은 하나님의 비통상적인 사역도 인정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

일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생각에 너무나 집착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체험적으로 사역하시고 말씀하신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셋째, 성령은 많은 것을 하나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안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만드시는데 있다.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저 12;13)는 말은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은 천차만별로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도 만드는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성전, 가족, 몸이란 말이 그것을 증거한다. 성전이란 말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며 구원 받은 개개인이 이룬 공동체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신자들 모두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롬 8;15-16). 바울이 말하는 몸의 이미지는 하나이지만 삼위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반영한다. 몸은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다양한 지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서로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성령의 사역을 오해하고 있다.

 

넷째, 성령의 사역은 은사와 열매 두 가지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성품(열매)과 사역(은사)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바울이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성도’이다. 성도란 거룩하게 된 사람을 말하며, 거룩이란 일부 슈퍼 스타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거룩한 삶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이 말하는 열매는 성령 안에서 공동체의 삶을 사는 신자들의 대표적인 성품들이지 성품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단체 속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경건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의 열매를 개인화시키는 그 자체가 문제이다. 상대방이 없이 어떻게 혼자 사랑하고 오래 참을 수 있는가.

한편, 은사는 보통 공중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행하는 은사(고전 12장)는 물론 생활의 은사(롬 12장)를 포함한다. 기적 행하는 은사들을 지나치게 방치하면 균형을 잃을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은사가 열매의 통제를 받는다면 개인적인 황홀 체험 보다는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은사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은사를 강조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열매를 강조하지만 어느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완전하게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섯째,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차이점이 많다. 먼저 건강한 교회는 거대 교회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둘째 여러 면에서 통제되고 형식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회의 예배를 바울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비슷한 사람, 언어, 종족만으로 모여 있는 교회를 바울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구경꾼이 야구장에 가듯이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예배는 행사 위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유급 성가대나 교역자들에게 예배를 맡기고 있다. 예배의 형식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예배가 메마르거나 형식화, 화석화 될 필요는 없다. 예전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기쁨이 흘러 넘칠 수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예배 시에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억제하고 소수가 주관하는 행사와 예식에 맡기고 있다. 그 결과 신자들의 삶은 메마르고 성령 하나님은 입술로만 섬기고 있다.

신자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성령이 당신을 가졌는가, 성령이 당신을 통제하는가,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가 이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계속 추구하고 사모하는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기도한 내용을 바울은 마음 속에 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인 성령이 우리들과 함께 하지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들을 구분할 방도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계속 구하고 찾고 두르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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