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여호수아

갈렙의 믿음을 축복하신 하나님

이창무 2015. 5. 3.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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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렙의 믿음을 축복하신 하나님


▣ 말씀 / 여호수아 14:6-15(민수기 13:1-14:24)

▣ 요절 / 여호수아 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믿음의 사람들의 인생을 한 마디로 표현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아는 사람”(신 34:10)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갈렙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갈렙은 늘 여호수아 뒤에 있던 2인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평가할 때 2인자로 평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갈렙의 믿음을 배우고자 합니다. 갈렙의 믿음이 여름 수양회를 앞둔 우리에게 내적 방향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내 나이 사십 세에 (14:6-8a)


14장 1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땅 분배를 위한 특별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땅 분배 방식은 제비를 뽑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명한대로 땅 분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땅을 분배할 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45년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당시 모세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포함하여 열 두 명의 두령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을 받고 남방에서부터 헤브론까지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했습니다. 정탐한 후에는 포도 한 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막대기에 꿰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온 회중 앞에서 보고했습니다. “우리를 보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축복받은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강하고 성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만 아니라 거인 족속들도 있었습니다.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입니다.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은데 어떻게 그 땅을 정복할 수 있겠습니까?” 정탐꾼들은 가나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도저히 그 땅을 얻을 수 없다고 악평했습니다. 이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 땅 백성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가서 그 땅을 쟁취합시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열 명의 두령들의 보고와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는 전혀 달랐습니다.


과연 이 차이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왜 똑 같은 것을 보고도 그들의 말은 서로 이렇게 전혀 달랐을까요? 이는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열 두령들의 마음 가운데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사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때 아낙 자손은 거대해 보이고,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작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자 그 땅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기름진 밥상으로 보였습니다.


사실 누구나 자기보다 키가 크고 몸집이 큰 사람을 보면 위축이 되기 마련입니다. 낯선 곳에 가면 두렵고 긴장이 됩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을 보면 두려움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불신으로 말미암는 두려움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민수기 14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는 나를 멸시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멸시하는 것과 불신하는 것을 똑같은 것으로 취급하셨습니다. 만약 제 딸 예진이가 어느날 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해 봅시다. “아빠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네요.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너무 막막하고 두려워 죽겠어요” 이런 말을 듣는다면 제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억장이 무너지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이와 똑같은 말을 하나님께 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한 적이 너무나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두려워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두려움이 마음 속에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두려움과 불안을 심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답은 한 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입니다. 믿음으로부터 내적 평안이 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생사화복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 보십시오.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가 사라집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봅시다.(히 12:2) 믿으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출국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그렇게 광활한 미국 땅도 아주 작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 보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상황이나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믿음의 진가가 더욱 더 발휘됩니다. 문제는 ‘내 마음 깊은 곳에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 이 두 사람과 다른 열 두령의 보고가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이 어떠했습니까? 열 두령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고 불며 통곡했습니다. 되지도 않는 말을 한다며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하나님까지 원망했습니다. 심지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열 두령들도 스스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나도 이렇게까지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백성들이 왜 이렇게 울고 불고 난리를 치는 거지?” 열 두령들의 불신에 찬 보고가 끼친 파급 효과가 이처럼 엄청났습니다. 두령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어떤 모양으로든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리더일수록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불신의 말이 상대방에게는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믿음의 말 한 마디가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에는 영향력을 받지 않고 열 두령들에게 영향을 받았을까요? 수적으로 열 두령이 더 우세했기 때문일까요?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을 가질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적을 이미 많이 체험했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사건, 만나를 내리신 사건,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변화된 사건 등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청종치 아니했습니다. 그 수많은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믿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죄악된 성향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믿음의 말에는 귀를 잘 기울이지 않고, 불신의 말은 잘 받아들이는 그런 본성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연인에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본성을 거슬러 부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투쟁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불신적인 생각을 합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문제 의식도 안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다고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해 주시기 않고, ‘왜 네가 나를 멸시하느냐? 왜 네가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며 진노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신은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나의 자연스러운 생각과 싸워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불신의 사고 방식에서 터닝해서 믿음의 사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싸워야 합니다. 기도는 새벽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이런 저런 불신의 생각과 싸우는 것입니다.(살전 5:17) 싸우지 않으면 죽습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그리고 내 후손들까지 다 죽습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부정적인 생각과 날마다 싸워 승리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악평을 한 열 두령들과 불신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심히 진노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20세 이상 된 사람들은 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좀 불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봐 주시겠지 하면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신한 자들의 결국을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광야에서 다 엎드려 졌습니다. 고린도 전서 10장 5절 6절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께서는 불신과 원망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을 혐오하십니다. 불신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불신의 죄를 범치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셔서 약속의 땅에 들이셨습니다. 모두 다 죽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만 남았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갈렙 장군의 믿음을 크게 기뻐하시고 그가 밟은 헤브론 땅을 그와 그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민주주의의 원리란 다수결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수가 지지해도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수가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수결이 아니라 믿음의 원리를 따른 갈렙과 여호수아의 손을 높이 들어 주셨습니다. 레밍스라는 불리우는 북극산 나그네쥐가 있습니다. 집단 생활을 하는 레밍스는 선두에 있는 쥐를 무조건 따라가는 독특한 습성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선두 쥐가 잘못해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면 그 무리에 속해있는 모든 쥐가 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습니다. 이럴 땐 깨어 있는 쥐 한 마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누군가 나서서 위험을 앞서 보고 무리를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대를 향해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눅 9:41)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현재에도 우리의 불신으로 인해 성령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26) 이 불신의 시대에 나 자신이 먼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깨어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두려워하는 무리들에게 믿음의 길을 제시하는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참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오늘날 내가 팔십오세로되 (14:8b-15)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헤브론 땅을 요구하고 차지하게 된 사건 속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갈렙의 신앙에 대한 저자의 평가입니다. 이는 갈렙이 헤브론 땅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온전히 좇았다는 말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만큼 충분히 그 분의 뜻에 순종했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갈렙의 신앙은 그의 삶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첫째, 갈렙에게는 나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갈렙은 하나님을 ‘내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모세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하나님’이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하나님, 갈렙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믿고 섬기는 인격적인 나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은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사울은 이 소리를 듣고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윗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질투심으로 악령에 사로잡혀 비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여호수아와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갈렙이나 여호수아나 똑같이 두령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갈렙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택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는 지도자로 세움 받고 자신은 그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고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옆을 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위에 계신 나의 하나님, 갈렙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영접하고 자신의 부여된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갔습니다.


둘째, 갈렙에게는 약속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9절과 1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말을 한 갈렙을 축복했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당장에 이루어질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갈렙은 무려 45년 동안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갈렙은 이 45년간 단 한번도 성경 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갈렙의 동료들은 다 죽었고, 산천이 여러 번 변하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말씀은 변함이 없었고, 갈렙의 믿음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서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각자 받은 바 약속의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우리는 각자 받은 바 말씀에 대해서 적어도 45년은 기다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갈렙이 45년을 겨우겨우 버텨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갈렙이 가진 것이 그저 꿈이거나 희망사항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붙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이 삶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45년 동안 믿음과 스피릿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굳게 서리 영원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리 굳게 서리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리라” 우리가 갈렙과 같이 우리가 일생 각자 받은 바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갈렙에게는 청년의 스피릿이 있었습니다. 10절 하반절과 11절을 보십시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현재 갈렙의 나이는 85세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은퇴해서 편안한 노후를 즐길 나이입니다. 뭔가 하고 싶어도 기력이 쇠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나이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85세의 나이에 새로운 일을 꿈꾸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나이는 비록 85세가 되었지만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강건하고 근육도 있고 힘도 세다고 하였습니다. 아마 그는 평소에 이 날을 기다리며 팔 굽혀 펴기를 하면서 자신을 몸짱으로 다듬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과 겨루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팔팔하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갈렙에게는 인생의 프라임 타임(Prime Time)이었던 40대의 스피릿과 85세의 스피릿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갈렙! 우리는 갈렙을 어떻게 기억합니까? 우리는 갈렙을 늘 푸른 청년으로 기억합니다. 힘없고 축 늘어진 노인 갈렙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노인과 청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노인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왕년에 말이지”, “나도 한창 때에는” 이런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면 그 사람은 노인입니다. 노인은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싫어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40세가 되면 내 인생은 꺾였다고 생각합니다. 50세가 되면 뒷짐을 지고 다닙니다. 노인은 소극적이 되기 쉽습니다. 모험을 싫어합니다. 반면 청년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청년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청년에게는 심장을 두근두근 뛰게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청년은 계속 변화를 시도합니다. 도전하고 모험을 감수합니다. 신체적인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이는 청년이더라도 기백과 비전과 꿈이 없으면 우리는 그를 ‘애늙은이’라고 부릅니다. 끊임 없이 도전하고 개척하는 사명인, 그는 언제나 청년입니다. 여러분은 노인의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청년의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인생 뭐 있어! 다 그렇고 그런거지’ 하면서 뒷짐지고 어슬렁거리는 노인이 되시겠습니까? 나이에 관계없이 꿈과 비전이 있고 도전하는 갈렙과 같은 영원한 청년이 되시겠습니까? '주를 앙모하는 자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우리 믿는 자의 삶은 주님 안에서 끊임 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 영원한 청년의 삶인 줄 믿습니다.


넷째, 갈렙에게는 고난을 앞장 서서 감당하려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이제 갈렙은 구체적으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고 말합니다. 갈렙이 요구한 산지는 헤브론 땅입니다. 이곳은 성읍들이 크고 견고합니다. 철기 문화를 이룬 강대한 블레셋 족속들이 살고 있습니다. 특히 골리앗과 같은 아낙 자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은 정복하기 매우 힘든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땅은 의미가 남다른 곳입니다. 헤브론에는 막벨라 굴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이곳에 묻혔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이곳에서 믿음으로 살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던 거룩한 땅입니다.  


이처럼 헤브론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얻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모두가 이 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때 85세인 갈렙이 앞장 섰습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갈렙은 승리의 비결은 상황에 달려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달려 있음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은 45년 전과 동일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갈렙처럼 전쟁의 최전선에 서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느끼는 사람부터 힘든 일에 앞장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솔선 수범해서 힘든 일을 자청하는 선배들을 보고, 후배들은 존경하고 그 뒤를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이 나이에 내가 하랴’ 이런 게 앞에서 말한 노인의 생각입니다. 군인이 빨리 늙는 이유가 다 있습니다. 사회에서 한창 뛰어다닐 나이에 직업군인들은 이래라 저래라 지시만 하다보니 빨리 늙는 것입니다. 갈렙은 자기 한 몸을 던져서 헤브론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를 후손 즉 유다의 기업으로 남겨 주고자 했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기업을 유산으로 남겨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 번뿐인 인생을 투자해서 다음 세대를 위한 믿음의 초석을 남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용사는 용사를 알아본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갈렙의 믿음의 말을 듣고 심히 기뻤습니다. 그를 축복하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주었습니다. 갈렙은 기업으로 받은 헤브론을 쳐서 정복하였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을 믿음으로 쟁취한 것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이것은 갈렙에게 일생의 열망이었고, 이 열망 때문에 갈렙은 영원한 청년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떤 산지가 있습니까?


그 산지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공기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모두가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갈렙의 믿음을 배워 이 산지를 믿음으로 정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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